실라 미요시 야거, <애국의 계보학>
거북선의 전략적 배치는 현재와 미래 모두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과거를 창조하기 위한 것이다. 즉 외세의 침략과 국가의 내분을 뒤로한 채 거둔 이순신의 승리는 북한 공산주의와 국가 분단에 대한 남한의 (최종적) 승리를 떠올리게 한다. 이 시기를 미래 세대를 위한 모범 사례로 내세우면서, 전쟁기념관은 이순신의 '효심 깊은' 후예로서 국가를 정당화하고자 했다.
<명량>-<한산>-<노량>으로 이어지는 세 편의 영화는 이순신을 주인공으로 세워 '세상이 혼란 할 때 나타난 한 사람의 영웅'을 소환한다. 그렇다. 우리는 평범한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다지 궁금해하지 않는다. 그 사람들이 나라를 일으킬 수 있을거라고도 믿지 않는다. 더구나 부패한 정부, 자기 이익만 챙기는 높은 자리에 있는 신하들은 이미 신뢰를 잃었다. 남은 건 단 한 명의 '특출나고 빼어난' 영웅이다. 내가 보기에, 아직도 우리는 '이순신'이 되어 줄 누군가를 기다린다(고 쓰고 '만들어낸다'고 읽는다).
이 책은 실라 미요시 야거의 첫 논문을 번역한 연구서이다. 어렵진 않은데 나한테는 '젠더'라는 개념이 좀 모호하게 다가오긴 했다. '남성성' 또는 ‘여성성’을 어떻게 다시 규정했는가? 가 더 정확한 표현인 것 같은데... (그게 젠더인가요 ㅋㅋㅋ)
내가 이해한 이야기로 다시 써 보자면, 조선시대까지는 '문신'이 권력으로나 사회적 지위로나 우세했다. 여기서 문신은 산 아래 정자에 앉아서 막걸리 한 잔 드시면서 시조 쓰고 서로 누가 글자수 잘 맞췄니 어쨌니 운운하는 ㅋㅋㅋ 여튼 중국의 한시와 한자에 능통한 신하들을 말한다. 이순신은 '무신'이다. 그래서 말타고 칼 싸움한다고 무시당했다는 일화는 여기저기서 볼 수 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진정한 남자'의 모습은 '글쟁이'에 가까운 모습이었던 거다. 그런데 문신이 최고라고 생각했던 조선의 남성성은 왜, 어떻게 근대를 지나면서 '바뀌었는가?'
여기서 신채호가 등장한다. 일제 강점기에 신채호는 조선이라는, 몇 백년의 역사를 가진 이 나라가 도대체 왜 망하게 되었는지를 고민한다. 그리고 '이순신' 그러니까, 무신에게서 답을 찾는다. 우리가 글만 읽어서 몸이 튼튼하지 않으니까 싸우지도 못하고 나라를 빼앗긴 거다, 그러니까 '남자는 힘!' 힘을 길러야 된다고 말하면서, 부패하고 나약한 양반의 이미지도 이 때 같이 만들게 되었다. '군인남성'의 이미지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실패한 민족성과 실패한 남성성 사이에는 반복적으로 만들어진 연관성이 함축되어 있다. 나약하고 거세된 양반의 이미지는 민족주의적 자기 비판의 수사에서 중심에 놓였고, 신채호와 같은 민족주의자들은 군인 남성의 새롭고 이상화된 이미지를 받아들였다.
3장에서는 이광수의 <무정>을 분석하면서 여성이 근대화(식민지 조선)을 거치면서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살펴본다.
나는 젠더로 코드화하는 새로운 방식을 전유한 결과,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이 병합되었다고 본다. 즉 여성을 통해 정치적 담론이 사랑, 결혼, 정절이라는 사적 맥락의 번역된 것이다. 여성의 개인적 행복(가장 중요하게는 가정생활에의 행복)이 갑자기 국가적 문제의 결과가 되면서, 여성의 사생활 역시 국가적 욕망을 정치화하는 무대가 되었다.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이 병합되었다는 지적은 중요하다. 조선시대의 여성들은 '공적 영역'이 아예 없었다. 이광수가 썼듯 "조선에서는 여자는 견마(개,말)과 다름없었소. 그네는 교육을 받을 권리가 없었고, 자기의 인격은 주장한다든가 독립한 생활을 영위함은 몽상도 못하였소." 여성은 공적 영역에는 진출 할 수 없을 뿐더러 사람이 아니라 재산으로 여겨졌다.
이광수의 <무정>은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한데, 전통과 근대의 대결(?)로 읽어보자면, 일단 이 작품에서 주인공은 '형식'이다. 그리고 전통(조선-망한 나라)를 상징하는 '영채' 와 근대적 여성인 ’선형'이 있다. 형식은 두 여성 중에 누구를 선택한지 갈등하는 인물이다. 당시 신문에 연재된 이 소설은 (지금 국민 드라마보듯) 영채를 선택해야 한다는 독자의 편지가 빗발쳤다는데 ㅎㅎ 형식은 영채를 '선택할 수 없다.' 왜냐하면 영채는 정절을 잃고(조선이 일제의 식민지가 된 것처럼) 형식은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선형과 약혼한다. (그래서 작품제목이 무정-정이 없다는거-임)
이런 상징으로 이 작품을 읽는다면, 형식은 '식민지 조선의 백성'(디폴드값 남성)이고, 이미 망한 나라인 조선은 뒤로 하고, 근대를 받아들여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근대'(개화된 조선)를 상징하는 '선형'은 영어를 배우기도 하는 (선생님이 형식임) 어느정도 근대성을 가지고 있지만 여전히 '누구와 결혼할 것인가'가 최대 관심사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여성이 근대를 지나면서 공적영역(사회)으로 진출했지만, '진짜 행복은 가정'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적영역이 교묘하게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공적 영역으로서의 진출은 허락했지만, 여성의 진짜 본분은 가정을 지키고, 가정을 유지해야 한다는 재생산과 돌봄의 역할이 그대로 주어진다. 또 하나는, 영채를 구원하는 것은 신여성 병욱이다. 나라를 뺏긴 남성은 이미 실패했기 때문에, 신여성이 옛여성을 구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라 구하는 거, 사회에 진출해서 돈 버는 거, 집에 와서 애 보고 살림하는 거 다 여성의 일이라는 거임. 그 삶이 너무 힘들면 누구를 찾아라? 다른 '여성'을 찾아서 해결하라는 거임. 남성들은 나라잃은 슬픔을 뒤로 하고 '근대적인 새로운 나라'를 건국하시느라 바쁘니까!!)
이 책에서는 영채가 구원받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형식을 포기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에너지를 국가로 옮겼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영채가 절개 있는 부인에서 절개 있는 애국자로 변이한 것은 가족에 관한 내용으로 채워진 주체성을 탈피한 뒤 대신 정치적 주체성을 구축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 책의 부제는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만든 서사들'이다. 단일하고 균일한, 굵은 선으로 이어지는 역사를 보여주지 않는다. 나 역시 역사는 하나의 선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수없이 많은 점들과 점들이 이어지고 떨어지며 모양없이 어디로든 흩어져가는 게 역사와 더 가깝지 않나 싶다.
덧, 이 책 검색하니까 한 뉴스에 '오바마 옛 연인이 파헤친 대한민국 애국의 계보학'이라는 제목을 달았던데... 이게 바로 공적영역과 사적영역의 병합 아니냐고. 교수, 작가로서 책을 내는 공적영역을 획득했지만 한국에선 여전히 00의 연인이라고 사적영역으로 소개되는 현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