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 갈수록 성적이 떨어지고, 특히 아빠와 대화는커녕 눈도 마주치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었다. 아빠가 무슨 말만 하면 고개를 푹 숙이고 눈물만 뚝뚝 흘리는데 너무 안타까워 보지 못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이와 상담을 해보니 아이의 문제가 아니었다. 아이는 벌써부터 커서 의상 디자이너를 꿈꿀 정도로 예쁜 옷을 그리고, 직접 자기 옷을 리폼해 입을 만큼 디자인에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아빠는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공부만 열심히 하라고 다그칠 뿐이었다. 결국 아이는 점점 기가 죽고 친구 관계도 소극적으로 바뀌며 생기를 잃고 있었다. 심지어 중위권을 유지하던 성적조차 곤두박질친 상태였다. 나는 엄마를 설득해 아이 아빠와 따로 약속을 잡고 코칭을 했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슬기를 무릎에 앉혀보신 지가 얼마나 됐나요?”
아빠가 주뼛대며 말했다.
“대여섯 살 때 무릎에 앉히고는…… 그 뒤로는 통 기억이 없네요.”
“왜 슬기와 관계가 어긋났다고 생각하시죠?”
“아이가 공부를 안 하니 답답해서 그러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빠와 단둘이 여행을 가는 것은 어떨까요? 슬기의 문제는 공부가 아니에요. 아빠와 관계가 원만해지면 성격도 공부도 자연스럽게 좋아질 겁니다.”
아빠는 며칠 고민을 하다가 직장에 월차 휴가를 내고 아이와 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며칠 뒤 아빠로부터 정말 즐겁고 뜻깊은 여행이었다며 감사의 전화가 걸려왔다. 특히 아이가 자신에게 스킨십을 하기 시작하는 등 달라지는 게 눈에 보여 꿈만 같았다고 한다.
“선생님 말씀처럼 제가 먼저 마음의 빗장을 여니 모든 게 달라졌습니다. 감사합니다.”
자신의 부족한 점을 깨달은 아빠는 그 뒤로 슬기를 미술 학원에 보내는 등 아이의 꿈을 인정해주기 시작했다.
코끼리 쇼를 본 적 있는가? 코끼리 쇼를 관람한 적이 있는데, 집채만 한 코끼리들이 앞다리로 천천히 물구나무를 서고, 공을 가지고 노는 등 신기한 재주를 뽐낼 때마다 성호는 탄성을 지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쇼를 보는 내내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
‘야생의 코끼리에게 저 우스꽝스러운 동작 하나를 가르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채찍과 당근이 필요했을까?’
쇠사슬에 묶여 참혹하게 길들여진 코끼리들의 선한 눈망울에 우리 아이들의 얼굴이 겹쳐지는 것만 같았다. 자신의 본모습은 A인데, 끊임없이 재능도 없고 관심도 없는 B를 강요하는 부모들. 못 하면 질책과 무시, 심지어 손찌검이라는 채찍을 휘두르고, 억지로 노력해 잘하면 당근을 주는 사육사와 똑같은 우리 부모들.
너무 당연해 잊고 있지만, 인간은 동물이다. 동물에게는 본능이라는 하나님에게서 부여받은 천연의 ‘재능’이 있다. 야생의 동물은 출생과 동시에 일어나 몸을 움직인다. 망아지는 태어나자마자 탯줄을 달고 일어나 걸음마를 시작한다. 작고 연약해 제멋대로 툭툭 꺾이는 다리로 움직이려 노력한다. 몇 번을 쓰러져 나뒹굴어도 필사적으로 일어나려고 하는 까닭은 일어나지 않으면 자연에서 도태돼 죽으리라는 본능 때문이다. 본능 하나에 의지해 태어난 고향을 향해 수십만 킬로미터를 거꾸로 헤엄쳐 오르는 연어처럼 가르친 적도, 배운 적도 없는 생을 스스로 일어나 위태롭게 터득해 나가는 야생의 삶을 보고 있으면 ‘생존본능’이라는 위대한 기적에 절로 고개가 숙여지게 마련이다.
반면 사람은 본능을 억누르는 방식으로 자란다. 공동체 사회에 편입시키기 위해 오랜 시간 훈련되고 길들여진다. 부모와 학교, 사회 등등 모든 공동체는 자신에 맞는 규범과 규약을 가르친다.
그러나 적어도 꿈만큼은, 아이의 인생을 좌우하는 꿈만큼은, 아이의 본능을 믿어보는 것은 어떨까? 부모가 바라고 학교가 바라고 사회가 바라는 꿈이 아이가 바라는 꿈과 맞지 않을 때 불행은 시작된다. 아이는 자신의 본능이 가리키는 길을 스스로 잘 알고 있다. 아이는 무궁무진한 재능을 이미 타고난 존재이지만, 그 재능이 무럭무럭 커갈 수 있는 환경이 아닌 억압받는 환경에서는 재능조차 빛이 사윌 수밖에 없다. 관상어 중에 코이라는 물고기가 있다. 이 물고기는 어항에 가둬 놓으면 5~8센티미터, 조금 큰 수조에 넣으면 25센티미터, 넓은 연못에서 자라면 1m까지 큰다고 한다. 바로 울타리의 한계로 인해 자신의 한계를 스스로 설정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 아이들의 발목을 칭칭 감고 있는 쇠사슬을 풀어주자. 아이의 본능에 어울리지 않는 재주를 가르치려 쓸데없이 노력하지 말자. 아이가 스스로 본능을 좇아 자신의 재능을 발견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자. 부모가 자식을 위해 준비해야 할 단 하나가 ‘믿음’이다. 부모의 믿음이 아이의 미래를 만든다. 믿음이 내 아이의 기적을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