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순간
게임대회에서 연거푸 패해 열패감과 불만이 가득한 얼굴을 한 채 울산으로 돌아온 성호는 그날 저녁 나와 남편에게 할 말이 있다며 가족회의를 제안했다. 그리고 성호가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하던 나와 남편은 마침내 ‘자퇴’라는 폭탄선언을 들어야만 했다.
“오늘 저 이긴 애도 학교 자퇴했대요. 그 애는 하루 종일 게임만 하는데, 저는 학교 다니느라 야자 빼도 아무리 많아야 5시간밖에 연습 못하니까 질 수밖에 없잖아요.”
성호의 불만은 불공평한 승부에 있었다. 같은 시간과 같은 노력을 경주했다면 게임에서 져도 기꺼이 승복을 하겠지만, 훨씬 불리한 환경에서 졌다고 생각하니 아쉬움이 들었던 것이다.
“자퇴하면 어떻게 할 계획인데?”
내 질문에 성호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하루 종일 연습해 다시 정정당당하게 겨뤄보고 싶다고 했다.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도전하는 성호의 의지에 흡족한 마음도 들었지만, 자퇴라는 인생의 방향을 바꾸는 큰 선택을 갑작스럽게 결정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엄마는 솔직히 걱정이야. 성호가 커서 우리에게 왜 게임에 빠져 있던 어렸을 때 좀 더 많은 기회를 주지 않았냐고 원망을 하지 않을까? 세상에는 굉장히 다양한 세계가 있는데, 그것을 보고 느낄 기회를 제공해주지 않은 것에 대해서 원망할까 봐.”
게다가 자퇴를 하면 그동안 성호가 맺었던 친구 관계도 자연스레 끊길 가능성이 높았다. 고등학교 자퇴한 친구랑 놀라고 등 떠미는 엄마는 없다. 결국 친구들도 소원해지다가 멀어질 수밖에 없을 거였다.
“그동안 아빠가 많이 바빠서 아들이랑 제대로 이야기도 나누지 못했네. 오늘 아빠랑 오랜만에 이야기 좀 할까?”
남편은 성호와 남자 대 남자로 이야기를 나눴다. 한 번뿐인 인생을 살아가면서 어떤 인생을 살지, 과연 게임이 인생의 전부인지, 게임 밖의 현실에서 가치를 찾을 수 있는 일들은 없는지, 꿈과 비전을 가진 삶에는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 성호의 미래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다. 새벽이 돼서야 대화를 끝내며 우리는 다음과 같은 합의를 했다.
1. 한 달 동안 프로게이머의 삶에 대해 충분히 알아보는 시간 가지기
2. 프로게이머 선배들에게 진로 상담해 보기
성호는 한 달 동안 학교를 다니며 열심히 치열하게 고민했다. 고민도 열심히 해야 나중에 후회하지 않는 법이다. 나와 남편은 성호가 최대한 많은 경우의 수를 생각할 수 있게 옆에서 도움을 주었다. 말을 물가에 끌고 갈 수는 있지만 물을 먹일 수는 없듯, 선택과 행동은 본인의 몫이었다. 그러나 말을 물가에 데리고 가 쉽게 물을 먹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은 부모의 의무이지 않겠는가!
성호는 프로게이머들과 수시로 연락하며 고민을 나눴는데, 신기하게도 프로게이머 대부분이 성호의 자퇴를 극구 만류했다는 것이다.
“내 나이가 벌써 스물일곱인데, 형이 네 미래 아니겠냐? 군대 갔다 오니 젊은 아이들을 따라갈 수가 없다. 추천할 직업은 아니다.”
“게임한 10년 동안 얻은 게 없어. 솔직히 형이 너라면 절대 자퇴 안 한다. 이거 비밀인데 형도 요즘 검정고시 준비하고 있다. 그냥 공부 열심히 해 대학 들어가고 좋은 직장 잡아서 돈 벌어라. 게임은 즐기면서 하는 게 최고야!”
실제로 먼저 똑같은 고민을 했고, 같은 꿈을 꾸던 인생 선배들의 경험에서 우러난 충고는 성호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한 달이라는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우리는 예정대로 다시 가족회의를 열었다. 나와 남편은 미리 합의를 한 상태였다. 성호가 한 달간의 심사숙고에도 불구하고 자퇴를 선택한다면 정말 힘든 일이겠지만, 믿고 받아들이자고 결론을 내렸다.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선택한 아이에게 왜 그런 삶을 선택했냐고 다그치는 대신 힘껏 응원의 박수를 쳐주자고, 그리고 우리도 함께 꿈이 이뤄지도록 열심히 도와주자고 굳게 약속했다. 그렇게 운명의 시간이 다가왔다.
“그동안 충분한 고민을 했을 것 같은데, 그래 결정했니?”
남편의 질문에 성호는 의외로 짧게 대답했다.
“제 생각이 너무 짧았던 것 같아요. 저 자퇴하지 않을래요.”
나와 남편은 손을 꼭 잡았다. 내색은 안 했지만 내 손도 남편 손도 땀이 흥건했다. 그만큼 성호가 꺼낼 말에 긴장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부터 게임은 즐기면서 하려고요. 형들이 그러는데 프로선수가 되면 그때부터 게임이 재미없어진대요. 게임 성적으로 돈을 벌기 때문에 진짜 즐길 수가 없대요. 저는 게임을 즐기고 싶거든요.”
“그래, 알겠다. 네 결정을 존중하마.”
성호의 결정에 남편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이제부터 뭐 할래?”
성호가 내 질문에 쑥스럽게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저…… 이제 고등학생이니까 공부 한번 해볼래요.”
움켜쥔 우리들 손에 다시금 불끈 힘이 들어갔다. 드디어, 마침내, 이제야, 성호의 입에서 공부를 해보고 싶다는 이야기가 나온 순간이었다.
성호는 인생의 터닝 포인트를 맞고 있었다. 한 소년이 자신의 길을 공부로 선택한 순간,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냥 부모가 가자는 대로 따라만 가는 아이가 아니라, 여태껏 자신이 선택한 길을 가던 아이가 공부를 선택했을 때는 어떤 놀라운 일이 눈앞에 펼쳐질까?
성호가 스스로 공부를 선택한 그날 이후, 나와 남편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성호의 기적 같은 변화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