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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튤립 Apr 19. 2021

굿나잇 책방에서 보내는 書信

서평: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


 써야 하는 분량은 쌓여가는데, 글이 손에 잡히지 않을 때가 있다. 이야기를 엮어나가는 것이 키보드를 두드리는 나의 손끝에 달려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도, 그저 막막하다. 노트북 앞에 앉아도 숨이 턱 하고 막혀와서 하릴없이 앉아있기만 한다.


 마음에 생채기가 나는 날엔 밥이 잘 넘어가지도, 잠이 오지도 않는다. 내가 누군가의 마음에 생채기를 낸 날엔, 더욱 그렇다. 눈물로 써 내려가는 글은 아름답지 않다. 단어를 고르고 골라 문장을 흩뿌려내도 이내 다시 지워버리곤 한다. 마음이 겨울에 머무는 순간, 다시 헤쳐 나오기 위해 나는 책장을 넘기며 얼어붙은 논밭을 지나 북현리로 떠난다. 몇 번이고 다시 읽었던 그 페이지로.


 이야기는 여주인공 해원이 직장을 그만두고 고향에 내려가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버스를 타고 강원도 구석에 자리한 북현리로 돌아온 그녀는 시골 구석에 자리하고 있는 책방을 보고 의아해한다. 서울도 동네 책방이 없어지는 판국에 산골 책방이라니. 단출하지만 아늑한 분위기의 굿나잇 책방은 그녀의 고등학교 동창인 은섭이 운영하고 있다.


p.27
스쿠터를 세워놓고 돌아서는데 해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참, 궁금한 게 있는데."
은섭이 걸음을 멈추었다.
"들판에 저 마시멜로들 말야, 짚 발효시키는 통. 그거 진짜 이름 알아?"
순간 은섭은 묘한 표정이 되었다. 그녀를 바라보다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책은 해원의 시선에서 쓰여 있지만 사실은 은섭의 서사이다. 책방을 나서는 해원에게 파카를 걸쳐주는 것 밖에 하지 못하는, 백열등 같은 그의 더디지만 따뜻한 마음. 누군가가 본다면 답답하고 바보 같다고 느낄 수 있는 한결같음. 밤늦게까지 불이 켜져 있는 해원의 창문을 바라보며, 그녀가 평온하게 잠들기를 바라는 은섭의 오랜 바람과 애틋함이 만들어낸 굿나잇 책방.


p.91
은섭이 몇 알 남은 딸기를 집어 먹는 걸 바라보다 그녀는 생각난 듯 물었다.
"참, 그 낱말이 뭔지 혹시 알아? 물결에 햇빛이 비쳐서 반짝반짝 빛나는 현상."
"알지."
그러고는 대답이 없어서 해원은 다시 말한다.
"알면 말해줘야지."
"말해줘도 너 또 잊어버릴 거잖아."
"애걔- 내가 왜!"
그가 소리 없이 웃으며 대답했다.
“윤슬, 이라고 해."
윤슬… 해원은 입속으로 중얼거려보았다. 예쁜 낱말이구나.


그저 한 걸음 떨어진 곳에서 그녀에게 작은 단어들을 알려줄 뿐인 그런 관계. 아주 오랜 짝사랑의 이야기. 하지만 뿌연 안갯속을 지나오면 옷자락이 젖어있는 것처럼 해원의 마음도 그로 물들기 시작한다. 지나간 페이지를 다시 들춰보게 되는 그런 작은 손짓으로.


p.202
혼자일 때 더 잘 보이는 것들이 있고, 외로움에서 배우는 일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 기대하는 바가 적을수록 생활은 평온히 흘러가니까. 진정으로 원하는 게 생기는 건 괴롭다.

…… 더 이상 농담으로 말할 수 없다는 건 심각하다는 뜻이다. 눈동자 뒤에 그녀가 살기 시작했다. 눈을 감아도 소용이 없다. 계속 보이니까. 사라지지 않는 잔상의 괴로움. 담요에 감싸인 그녀의 모습. 온종일 입술에 맴도는 첫 키스의 감촉.


 돌고 돌아 서로의 마음을 오롯이 마주한 이후에도, 두 사람은 방황한다. 상처를 받아본 사람만이 알고 있는 두려움. 그 지독한 흉터와 상실감에 또다시 아프게 될까 봐 몸을 사린다. 빠지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그럼에도 속절없이 서로를 앓는다.


p.209
 그의 사랑은… 눈송이 같을 거라고 해원은 생각했다. 하나둘 흩날려 떨어질 땐 아무런 무게도 부담도 느껴지지 않다가, 어느 순간 마을을 덮고 지붕을 무너뜨리듯 빠져나오기 힘든 부피로 다가올 것만 같다고. 그만두려면 지금 그래야 한다 싶었지만 그의 외로워 보이는 눈빛에서 피할 수가 없고, 그건 그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은섭은 마침내 결심이 선 듯 싱긋 웃었다.
"그래. 가보자. 너를 사랑하면 어떻게 되는지. 나중에 알게 되겠지."


 언제나 해원보다 더딘 감정을 보여주던 은섭은, 용기를 낸다. 그리고 결심한다. 그녀의 곁을 지키기로. 은섭의 기쁨은, 그와 함께 있을 때 해원의 그늘이 옅어진다는 것. 전보다 눈이 부시게 웃는 순간들이 늘어난다는 것. 분명 사랑을 하며 무언가를 잃었음을 알고 있는데, 새로 얻은 게 좋아서 무엇을 잃었는지 알고 싶지도 않은 그런 마음을 차곡차곡 쌓아간다. 해원이 떠날 때까지.



겨울의 끝자락을 뒤로 한 채로 헤어진 그들이, 날씨가 따뜻해지면 만날 수 있을까?


 촘촘하고 아름다운 문장으로 빚어낸 이야기는 그저 읽기만 해도 마음의 허물을 되돌아보게 한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는지,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이 어떤지, 그리고 어떻게 상처를 견뎌내야 하는지, 한줄한줄 읽어 내려가며 나의 상처를, 그리고 그대의 상처를 보듬는다.


 사랑의 모양은 하나로 정의할 수 없다. 이 세상의 모든 똑똑한 사람도 사랑을 하면 바보가 되곤 하니까. 다만 알 수 있는 건, 나의 마음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고통스럽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 나의 사랑이 칼날이 되어 상대방을 다치게 한다면, 칼날을 돌려 내 심장으로 받아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 그저 함께하는 시간에 그대의 그늘이 옅어지는 것에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돌아오지 않는 마음을 알게 된다면 그만두고 떠날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 책장을 넘기며, 은섭의 말들을 곱씹는다. 눈 앞이 뿌옇게 흐려져도, 오늘은 괜찮다.



밤이 깊었습니다.

버드나무에, 바람이 불어요.

굿나잇 그대, 굿나잇.











p.s. 소설을 바탕으로 한 동명의 드라마를 보는 것도 추천합니다. 잠이 오지 않는 밤, 하나씩 이야기를 꺼내본다면, 그대도 굿나잇 클럽이 될 수 있어요. 로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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