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연하지만 뿌리는 단단한 그런 삶을 꿈꾸지만, 실상 내 일상은 매일매일이 나날이 흩어지는 삶이다. 뭔가 하루하루 바쁘게 움직이는 것 같은데 뒤돌아보면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 요즘, 차분히 앉아서 글을 쓴다는 게 얼마나 큰 의지와 의식을 곁들여야 가능한 일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쓰지 못하는 날이 길어질수록 늘 가슴 한편엔 아쉬움이 남는다.
얼마 전부터 아이가 숙제로 독서록을 쓰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1학년 아이의 독서록이 뭐가 그리 힘들고 대단한 것이겠냐만은. 나는 그 알림을 본 순간부터 '망했다.'는 생각이 스치며 핸드폰을 들고 있는 손에서는 진땀이 났다. 주 3회씩 써서, 매주 월요일마다 검사를 하시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주 1회도 아니고 주 3회라니, 이를 어쩌나. 담임선생님의 의욕이 대단하다 싶었다. 나도 책 리뷰 쓰는 게 그리 힘든데, 이제 겨우 더듬더듬 읽고 쓰는 아이와 이젠 독서록으로 씨름을 하게 생겼구나.
역시나 예상대로였다. 아이는 어릴 때부터 책을 읽어주고 이야기를 하며 대화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해보려고 하면 책을 덮어버리고 다른 책을 읽고 싶어 했었다. 그럴 때면 나는 '그래, 네가 느낀 책의 감동은 감동대로 간직하렴. 이런 건 나중에 해도 늦지 않아.'라고 존중해 주었었다. 그렇지만 아들아, 이제는 너의 그런 독서스타일을 더는 존중해 줄 수가 없겠구나.
"책을 읽고 드는 생각이나 느낌을 말이 아닌 글로도 표현해 보는 거야."
"어려우면 그림으로라도 표현해도 좋아. 글을 한 줄만 써도 돼."
"아니면 말로 얘기해 봐. 엄마가 듣고 적은 걸 네가 옮겨 써도 돼."
라고 살살 달래기도 하고 윽박도 지르면서, 내 허벅지도 여러 번 찔러가며.. 지난 한 주를 보냈다.
꼭 쥔 연필 아래가 그래도 조금씩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조금씩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작은 손에서 그려지는 글자는 암호에 가까워 보일 때도 있었고, 한 줄에 틀린 맞춤법이 수두룩 한 것도 있지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일단 쓰기 시작했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아이에게 유난스럽게 무한칭찬을 날려주었다.
첫 주의 독서록은 한 줄 남짓의 문장과 그림이 곁들여져 있었다. 이를 테면 아이가 기억나는 장면을 묘사하는 그림들이었다. 그 한 줄은 어떤 장면의 글을 자기식 대로 기억해서 그대로 옮겨 쓰는 식으로 채웠다. 그걸 보니 또 엄마마음이 불쑥 튀어나와, "독서록은 너의 생각과 느낌을 글로 적는 거야." 라며 아쉬움을 살짝 피력해 보았으나, 아이는 빨리 벗어나고 싶었는지 이미 내 옆에 없는 뒤였다.
그래,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하리. 일단은 반은 성공이었다. 한 줄만 써도 된다고 했는데, 막상 연필을 잡은 꼬마필자는 쓰다 보니 욕심이 났는지, 대문짝만 한 글씨와 꾹꾹 눌러 담은 그림들로 하루분량을 채워 넣으려는 노력이 곧곧에 눈에 띄었다.
아이의 독서록을 곁에서 봐주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글자 쓰기에서 더 나아가 '글을 쓴다.'는 것이 이렇게 쉽지 않은 일임을... 그 어릴 때 우리 선생님들과 부모님들도 이렇게 곁에서 지켜봐 주셨겠지.
지금은 다 정리해서 버렸지만, 초등학교 1~2학년 때 방학 동안 친구에게 편지 쓰기 숙제를 하며 주고받은 편지가 있었다. 그동안에는 초등학교 1학년 때 주고받은 편지가 으레 초등학생이니까 쓸 줄 알았겠거니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는 걸 새삼 느꼈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아주 작은 사소한 행동과 습관들도 부모님, 선생님, 혹은 그 누군가와의 상호작용 속에서 체득하게 된 거라는 걸 정말 많이 느낀다. 이를 테면 가방끈 꼬인 것을 바로 메는 것이나, 속옷을 넣어 입는 것이나, 입에 묻은 건 옷으로 닦지 않는 것 등등 무수히 많은, 지금은 아무 의심 없이 하게 되는 당연한 행동들 말이다. 당연하다고 생각한 것들이 아닐 수도 있고, 어쩌면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아이를 키우며 더 자주 마주하게 된다.
그래, 어쩌면 글 쓰는 인간으로 산다는 것도 그런 일이야. 더군다나 못 쓰고, 못 그리면 어쩌나 하는, 그건 마치 흰 모니터에 깜빡이는 커서를 보면 머릿속이 하얘지는 경험만큼이나 글쓰기를 두려움으로 치환시키는 우리 사회 분위기도 한 몫했을 거 같다. 요즘은 그런 강박보다도, 사업, 일, 엄마, 와이프, 딸 등등 수시로 흩어지는 나를 관찰하고 직면하기가 힘들어서 그러는 것 같기도 하다. 오히려 의식해서 그런 나를 자각해야 하는 요즘이다. 온갖 온라인의 유혹적인 흥밋거리들을 뒤로한 채 하얀 바탕에 검은 커서를 마주하며 째려보는 일은 생각보다 품이 많이 드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래도 하루, 이틀, 한 달이 바람에 훅 날아가 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 땐 잠시 글 쓰는 인간이 되어본다. 그렇게 나를 들여다본다. 아직 한글도 겨우 읽고 쓰는 아이를 글 쓰는 인간으로 업그레이드시켜야 하는 중차대한 역할은 바로 '엄마'이기에 가능한 특명임을 영광으로 생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