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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슨 Oct 19. 2023

텅 빈 서울을 탐하다.

 

 추석 연휴 7일 전, 친정엄마가 코로나에 걸렸다. 비타민C의 기적이 무너졌다. 그 사이 안부확인 차 주말에 다녀왔는데 엄마가 추석 때 말고 그다음 주에 오란다. 아무래도 같이 지낸 아빠가 걸렸을까 봐 조심스러워서 그렇단다.


 아마 처음인 것 같다. 결혼 후 추석 때 양가 집에 가지 않은 게. 시댁은 시부모님이 안 계셔서 조촐하게 형님댁과 시누가 전부다. 그마저도 친정에 가시거나 여행을 잘 가셔서 연휴가 끝나고 보곤 했으니까.


그러던 중에 이번 추석 연휴가 길다는 이슈는 나에겐 큰 의미가 없었다. 특별히 여행이나 약속을 잡지 않는 한 연휴가 며칠이나 되는가는 새지 않게 된 거 같다. 그러고 보니 연휴가 설레지 않게 된 게 좀 된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이번 추석연휴는 연휴 같지 않은 연휴였다. 이대로 라면 무계획 예약이었다. 마음이 편치도 않고 걱정도 되니까. 그래서 그냥 아무 생각이 없는 채로 있었다. 그런 나를 간파한 신랑이 슬쩍 묻는다.

"추석연휴 때 어디 갈까?"


"갑자기?? 가긴 어딜 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실은 내 목소리엔 그럴 것이라는 자신이 없었다. 신랑이 던진 한마디에 눈동자가 흔들렸다. 달력을 다시 보았다. 들여다보면 뭔가 거리를 찾으려는 심산처럼. 그런데 나갈 꺼리는 고사하고 긴 연휴 집에서 달달 볶이고 있는 내 모습이 그려졌다.


그렇게 갑자기 호텔예약사이트를 뒤지기 시작했다. 뭔가 정신이 번쩍 들었던 거다.


요즘은 여행도 준비하기 귀찮아서 잘 안 가게 되었다. 마음먹기 쉽지 않다. 그러고 보면 정말 여성은 출산 전후로 많이 변한다. 수첩하나 가득 채울 정도로 홀로 준비해 갔었던 9박 10일의 스페인 여행은 서른 살의 열정 그 자체였지만 이제 그건 세월 앞에 사그라든 지 오래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돌이켜보니, 잘 다녀왔다고 하고 싶어서 준비하는 것들이 너무 많아졌기 때문이다. 좋은 여행이고 싶어 준비하는 것들,, 여행정보는 차고 넘치지만 그런 일련의 과정들이 오히려 언젠가 부담으로 다가오게 된 것 같다. 오히려 정보를 찾기가 어려웠던 때가 더 나은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이렇게 닥쳐서 갑자기 훌쩍 떠나는 데에는 장사 없다. 그게 더 좋을 때도 있다. 사실 돌이켜보면 계획 없이 떠난 곳이 더 오래 남는 법이다.


이미 나는 여느 때와는 사뭇 다른 결정력과 추진력으로 호텔비교사이트를 가입했다. 그리고 1박 숙박요금을 하루 만에 결제해 버렸다.



그렇게 우리는 가깝지만 늘 멀게 느껴지는 서울로 갔다. ​


 꽉 막혀있을 고속도로에 우리 차까지 얹고 싶지는 않았다. 고속도로를 비껴서 갈 수 있는 곳은 서울이 유일했달까. 다만 도착하면 웬만한 거리는 다 걸어 다닐 생각이라 차를 놓고 갈까도 싶었지만, 고행길이 될까 두려워 포기했다.

 한 시간 정도 걸려 도착한 곳은 을지로역 근처에 위치한 PJ호텔이었다. 을지로 쪽은 처음이었다. 경기 촌년이 서울이라고 하면 신촌, 홍대, 명동, 강남... 요정도가 전부였기 때문이다. 서울을 분절적으로만 알고 있는 나에게 이번 여행의 큰 소득이라고 한다면 서울을 많이 걸어 다닐 수 있었다는 것과 그래서 마치 못 맞춘 퍼즐 조각이 하나 둘 채워지는 느낌으로 머릿속에 서울을 연결할 수 있게 되었다는 거다.

 추석 하루 전, 서울의 오후는 비교적 한산했다. 과거의 모습과는 많이 달라진 명절귀경길이지만, 그래도 명절은 명절이고 추석은 추석인가 보다. 차는 체크아웃할 때까지 끌고 나갈 일이 없을 것이었다. 짐을 풀고, 을지로 일대를 걸었다.

 오래된 인쇄소와 노포 골목. 아이는 동네에는 잘 없는 골목길의 골목골목을 흥미로워했다. 처음 거닐어보는 곳이라 평소 때는 어떤 모습인지 비교할 수 없어 조금 아쉬웠다.

 길 따라 명동방향으로 걸으니 신랑이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는 명동성당에 도착했다. 나도 약 15년 전쯤? 친구 결혼식 때문에 갔던 거 빼고는 처음이긴 마찬가지였다.
 명동성당은 정제된 아름다움이 있었다. 성당이 가지는 역사적 상징성 때문인지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아이는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에 시선을 뺏겼고, 엄숙한 분위기에 압도되었는지 자연스럽게 속삭였다.

"엄마, 나도 기도했어."

역시 뭐든 경험해 봐야 맛이다.


 아이 3살 때 다녀갔었던 남산한옥마을은 그때보다는 확실히 외국 관광객들이 더 많았다. 추석의 위력인가..
 어둑어둑해질 무렵 저녁은 뭘 먹을까 고민하며 나가고 있는데, 풍물패의 길놀이 소리가 들렸다. 가자소리도 할 것도 없이 자연스럽게 다시 한옥마을로 발길을 돌렸다. 길놀이를 따라 들어간 끝에는 집 안뜰에 이미 공연을 보러 앉아있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공연의 시작이었다.​​ 아이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무대 한편에서 오프닝 공연 중인 DJ의 움직임을 숨죽여 보았다. 그런데 여느 풍물패의 공연과는 사뭇 다른 공연이었다. 테크닉 한 전자음과 아날로그의 풍물가락의 만남이 독특했다. 특히 연주자가 여러 다양한 악기들의 가락과 본인의 음색을 하나씩 덧입혀 내는 공연 도입 부분은 좀 실험적인 면이 있어서 지루하기도 했는데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드디어 메인인 풍물패 공연. 활기차고 역동적인 장단에 그 누구보다 내 몸이 먼저 반응하고 있었다. 양 허벅지 위에 손을 올려놓고 장단을 맞추려는 걸 참고 어깨만 들썩이면서.. 20년 전 장구재비는 이제 없지만 에너지 넘치는 언니들의 흥에 나도 모르게 아이에게 라떼맘이 되었다.

"엄마도, 옛날에 저렇게 상모도 돌리고 장구도 쳤었다?!"

"오잉? 진짜??"

"그럼, 꽤 잘한다고 칭찬도 받았었어."

 소중한 한 끼 저녁과 맞바꾼 공연이었다. 그래도 다행히 아이도 우리도 기분은 좋았다. 들어가는 길 아이의 성화에 피자 한판을 들고 숙소로 향했다. 맛집 천국인 서울에서 점심엔 햄버거, 저녁은 피자라니, 그 을지로의 힙하디 힙하다는 카페도 가보지 못하고(음... 노키즈존이었길 바란다). 역시, 아이와 함께하는 여행에는 늘 계획대로 되라는 법이 없다.

한국인 없는 종묘, 경복궁이 생경하다.

 추석 당일 아침. 늦잠 대신 선택한 맛난 조식. 추석 아침이라 삼색나물과 한과, 송편이 있었다. 기분 좋게 아침식사를 한 후 우리는 바깥을 산책하기로 하고 밖으로 나갔다.
 종묘를 가기로 했다. 숙소로 도보로 20분이면 갈 수 있는 곳. 마침 신랑은 가보지 못했다고 했다. 가는 길목에 자리 잡은 청계천의 물소리가 발걸음을 가볍게 했다. 계단으로 내려갔다. 걷다 보니 서울 도로 한 중앙을 가로지르며 과거와 현재를 맛볼 수 있었다. 우리가 출발한 을지로 인쇄소 거리 구시가지의 노포와 오래된 쇼핑상가들을 지나니 옆 블록에는 아이가 우와 할 정도로 높은 빌딩들이 즐비했다.​​
 
 추석 아침, 어떤 여성분들 두 명이 청계천에 앉아 샌드위치와 함께 담소를 나누는 모습에서 여유로움이 느껴졌다. 도로 한복판을 관통해 흐르는 물에 잠시 발을 담그고 쉬어갈 수도 있고, 시끄러운 경적과 매연 자동차의 시선들을 느끼지 않고 달릴 수 있다. 10 계단 정도 내려왔을 뿐인데 순간이동을 한 듯하다. 청계천 복원 덕분에 서울은 걷기 좋은 도시에 더욱 가까워졌다.
 
 도착한 종묘는 외국인들 차지였다. 분명 우리나라에 와 있는데도 여기가 외국인가, 묘한 느낌이 들었다. 아쉽게도 종묘의 메인건물은 복원공사 중이라 볼 수 없었지만, 기왓장과 돌기둥 하나하나 해체하여 마당 앞에 놓인 모습을 보는 것도 흥미로웠다. 종묘의 모든 건물들은 궁과는 다른 간결함의 아름다움이 있다. 장식적인 요소를 최대한 배제하여 조상에 대한 예를 갖췄다고 한다.

 돌아와 체크아웃을 한 우리는 경복궁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북촌과 서촌일대를 돌아다니기로 했다.

 꽤 더운 날씨에도 갖춰 입은 한복차림을 한 외국인들이 대다수였다. 한복을 당당히 즐길 수 있는 이곳에서 오히려 우리가 외국인 같았다. 나도 다음에 해외에 나갈 일이 있다면 그 나라 전통옷을 입어보는 경험을 꼭 하리라.
 
 엽전화폐를 이용해 도시락카페 이용을 한다는 시장이 서촌의 통인시장인 걸 모르고 있다가 돌아다니다가 알았다. 이미 점심을 시장엣 해결한 후라 많이 아쉬웠다. 추석전야의 분주했었을 시장도 추석엔 장사 없다. 북적북적했을 시장광경을 상상해 본다. 다음에 또 올 일이 있다면 그때는 신랑과 둘이 홀가분하게 와서 경험을 해보고 싶었다. 기왕이면 가져간 다회용기에 맛나게 담아서.

​ 다음으로 향한 북촌한옥마을, 어제와는 사뭇 다른 인파 속에 터질게 터졌다. 아이와 함께 하는 여행에 한 번은 꼭 트러블이 있기 마련. 아이가 조금 힘들었는지 어제 다녀왔던 남산한옥마을에서 못한 체험프로그램을 하고 싶다고 했다. 사실 어제저녁부터 하고 싶다고 했는데, 오늘까지 하고 싶다고 할 줄 몰랐다. 북촌한옥마을에 매듭체험공방이 문을 열었다기에 거기서 그거라도 해보기를 바랐는데, 막상 사진을 보여주니 하기 싫단다. 활 만들기를 하고 싶다고 징징거리는 통에 나도 짜증이 나고 신랑도 짜증이 나고. 다 들어줄 수는 없는데 신랑은 나의 짜증 섞인 말투와 안된다고 만하는 나에게 화살을 돌렸다.  아마도 집에 가야 할 시간이었던 거 같다.
​​

 첫 카페. 분위기 전환을 위해 문 연 곳을 겨우 찾아 들어간 곳에서 아이는 작은 도넛과 아이스크림에 이전의 상황들을 다 잊은 듯했다. 신랑도 나도 어제오늘 오랜만에 많이 걷느라 수고했다고 커피 한 잔에 무언의 화해를 걸었다.

 서울 곳곳을 두 다리로 걸어 다니는 경험은 생각보다 꽤 괜찮았다. 다만 문 닫은 식당과 카페가 많아서 조금 아쉬웠지만.
 
 

광장시장의 인심 좋은 생과일 주스 아주머니와 청계천의 오리 한쌍, 치마와 모자로 한껏 치장한 남자 외국인의 미소 그리고 아이와 거닐던 빌딩 숲과 밤거리는 기억에 남을 것 같다.

 텅 빈 서울은 여유로웠고, 홀가분했다. 도시 전체가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그간 바빴던 도시에도 잠시 쉼이 필요하다는 걸 느끼게 해줬다. 빠져나간 사람들의 빈자리는 오래전부터 이곳에 존재하고 있던 것들로 채워지고 있었다.

 그날 저녁 조금씩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고 있는 그곳을 뒤로한 채 우린 떠났다. 돌아가는 길, 통인시장에서 엄마가 드시고 싶어 하신 복숭아를 한 상자를 샀다. 엄마가 쾌차하셨으면 하는 마음으로.. 우린 친정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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