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0여 년간 피어왔던 담배를 끊었던 아빠였다. 한 차례 담배를 끊었다가 다시 피운 전력이 있었던 그의 재금연 선언이 그때는 전혀 놀랍지 않았다. 지독한 엄마의 잔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던 아빠의 흡연에 제발 좀 끊으라는 당부는 포기당한 지 오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냉소 가운데에서 우리 모두는 이번엔 다른 그의 굳은 의지에 의심을 거뒀다. 그가 1년 넘게 단연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써 엄마의 근심거리였던 아빠의 흡연은 다시 펴지지 않게 꾹꾹 구겨서 버리기 직전인 쓰레기였고, 엄마의 감정쓰레기통이었던 맞딸은 그것을 받아주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그렇게 찌든 때 끼 듯 뒤덮여 있던 집안 곳곳의 애연의 흔적들은 연기와 함께 걷혀가고 있었다. 그리고 아빠의 얼굴에 끼어있던 니코틴 때도 벗겨지기 시작했었다. 내 기억 속 아빠의 얼굴은 늘 빨갛거나 거무튀튀하거나 그 사이 어디쯤이었는데 적어도 지금은 한결 가벼워 보였기 때문이다.
아빠의 금연의지가 길어지면서 친정의 다용도실은 아빠 간식창고가 되어갔다. 뻥튀기, 크 oo산도, 버터 ooo 스낵보다는 크래커를 좋아하는 아빠는 손주에게 자신의 간식을 내어주기도 했다. 손주와 함께 아이 같은 표정으로 과자를 먹는 아빠는 영락없는 아이얼굴이었다. 아빠는 종종 아이 같았다. 그런 지점이 엄마를 화나게 했다. 엄마는 받아주지 못했고, 징글징글하다고 했다.
나도 그런 아빠가 싫었다. 아빠는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사는 사람이었다. 경제관념도 부족한 사람이었다. 집에서는 늘 과묵한 사람이었는데 아빠 주변엔 늘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 아빠를 엄마는 견디지 못했고, 바꾸려고 했으며, 그럴수록 아빠는 더 튕겨 나갔다.
그런데 엄마는 내가 아빠를 더 닮았다고 했다. 그럼 나는 내가 알고 있는 나를 통해 아빠를 이해해하려고 했다. 내게 아빠는 끝까지 가 닿아본 적이 없는 그런 사람이 어서였다. 그래서 잘 안다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모른다고 할 수도 없는 그런 사람. 누군가가 아빠는 어떤 분이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한마디로 대답하기 어려운 사람. 뿌연 안개 같은 존재. 그렇게 아빠는 늘 엄마 뒤에 서 있었다. 아빠의 마음, 생각, 자리는 엄마의 긴 그림자에 가려져 보일 듯 말 듯했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늘 엄마가 있었다.
엄마는 아빠로 인해 입었던 깊은 상처들을 피가 나도록 긁다가 겨우 아문 상처들을 계속 후벼 팠다. 그럴수록 아빠는 그런 엄마 옆에서 서서히 입을 닫았다. 엄마는 아무리 쏟아부어도 부족하지 않는 아빠에 대한 미움의 감정이 틀리지 않았음을 인정받고 싶어 했고, 오히려 그 사실이 엄마를 옭아매는 것 같았다. 엄마는 아빠에게 미움과 동정이라는 두 가지 감정 때문에 늘 괴로워했던 거 같다. 엄마에게 아빠는 가해자였고 엄마는 피해자였다. 나는 그녀의 말을 통해서만 그를 읽었다. 그렇게 아빠를 이해했다. 그리고 그녀의 남편이자 나의 아빠는 그렇게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왜 아빠를 떠올리면 늘 엄마가 부록처럼 떠오르는 건지, 그것이 왜 죄책감으로 다가오는 건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런 아빠에게 왜 그랬는지 묻고 다가가지 못했는지 되묻곤 했다.
이런 의문은 지금도 가슴 한편에 소화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있다. 아마 이제는 화석처럼 굳어져 어디가 시작이고 끝인지 구분할 수 없게 됐다.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그러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이대로 지내도 크게 문제는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비교적 원활한 부모자식 간이었고, 새삼스러웠다. 사실 그럴 용기가 없었다. 아빠와 일대일로 마주할 용기가 내겐 없었다.
내가 좀 더 세상을 이해할 수 있게 되면, 그때쯤이면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때쯤이면 그렇게 서로를 죽일 듯 싸우다가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자신들의 삶을 감내하며 오로지 자식들만 생각해 살아온 아빠와 엄마를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시기가 생각보다 빨리 당겨질 거 같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난 아직 준비가 안되어 있다. 늘 마음대로 되는 건 없다. 알면서도 또 실수를 했구나.
아빠가 아프다. 평생 마른 몸을 유지하면서도 하루에 담배 한 갑 이상을 피워도, 술도 마음껏 마셔도 잔병 하나 없이 건강했던 아빠였다. 늘 나는 걱정했었다. 엄마가 먼저 돌아가시고, 아빠가 혼자 남을 거 같아서였다. 아빠 혼자 남은 여생을 잘 살기 힘들 거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예상이 어쩌면, 틀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주가 지나야 정확한 진단이 나온다고 했지만, 폐암 4기일 확률이 높다고 했다. 올봄 폐렴판정을 받고 지독한 항생제를 먹어가며 완치판정을 받은 지 불과 3개월여 만이다. 전화너머로 엄마의 목소리가 떨린다. 늘 아빠 앞에 당당했던 엄마가 두려워하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다. 엄마도 요즘 몸이 안 좋으셨었기에 아파할 아빠를 감당할 수 있을지도 걱정되었고, 무엇보다 아픈 아빠를 똑바로 마주할 자신이 내게는 없다.
그 소식을 듣고 아빠와의 일들이 스쳐갔다. 한 손가락에 꼽히는 몇 개 없는 작고 소중한 장면들이었다. 그리고 아빠와 내가 함께한 일이 또 뭐가 있나 떠올려봤지만 더는 생각나지 않았다. 사진에 기대어 떠올려야 했다.
이제는 엄마 뒤에 가려져 있던 아빠의 민낯을 용기 있게 마주해야만 하는 시간이 왔다. 그런데 그 시간이 예상보다 너무 빨리 와서 화가 난다. 내년이 칠순, 동갑내기 부모님 내년엔 다 같이 해외여행을 가자고 제안하려던 터였다. 지금 같아서는 가능할지 요원해졌다. 요즘 치료기술이 좋으니까 아빠만 잘 견뎌낸다면 또 생각보다 의연하게 지낼 수도 있지 않을까?
다음 주 주치의 면담에 아빠의 보호자로 동행하기로 했다. 이제는 딸, 엄마가 아닌 부모님의 보호자로서의 역할이 어색하지 않을 나이가 되었구나. 벌써부터 내 표정을 어찌 지어야 할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분명히 나는 또 아무렇지 않게 아빠를 대할 것이다.
끝까지 가 닿아본 적 없는 아빠의 마음에 먼저 손을 내밀 기회가 왔다. 이번엔 외면하지 않아야 한다. 마음을 먹었다. 이제는 엄마의 남편으로써가 아닌 나의 아빠로.. 내가 알고 있던 이해할 수 없었던 그 아빠를 나의 관점에서 다시 헤아리고 알아가기로. 이젠 그만큼 나도 컸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