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화초로 말할 것 같으면, 매년 얼굴을 보며 산 지 십 년은 더 된 오랜 지기 같은 존재다. 왜냐하면 친정엄마가 키우던 건데 엄마도 나도 이 화초가 피워내는 꽃이 참 좋아 씨를 받아다 신혼 때부터 지금까지 키웠기 때문이다. 이 친구의 이름은 아기범부채. 그렇지만 진짜 맞는 이름인지는 나도 정확히 모른다. 봄마다 보여주는 꽃망울들이 참 청초하고 앙증맞으나 이름을 모르니 답답해서 찾아봤었지만 정확한 이름을 모르겠다. 범부채라는 꽃이 있는데 모양이 아기범부채가 맞는 거 같아서 그냥 그렇게 부르기로 했다.
화초에 대한 지식이 전무해서 그런 건지 아기범부채의 번식은 진짜 신기하다. 아기범부채는 씨앗으로도 번식하고 뿌리? 로도 번식하는 재미있는 화초다. 아기범부채는 죽은 듯이 땅속에 있다가 2월부터 싹이 나기 시작하고, 4월~5월 반짝 꽃이 피다가 지면 꼭 무슨 벌레알 같은 짙은 팥죽색의 씨앗들이 주렁주렁 달린다. 들풀 같은 잎사귀를 같진 범부채는 머리에 큼지막하게 달리는 씨앗들 때문에 축축 늘어진다. 그럼 나는 그 씨앗들이 익어서 톡톡 터져나갈까 봐 석류알처럼 주렁주렁 아슬하게 매달려있는 씨앗들을 받아 놓곤 한다.
씨앗마저도 다 떨구고 나면 본격적인 여름의 시작이다. 그러면 아기범부채는 언제 꽃을 피웠냐는 듯, 그리고 그냥 푸릇푸릇한 잎사귀만 초록의 여름을 지낸다. 그리고 물을 죽죽 빨아댄다. 가끔은 그런 아기범부채가 아쉽다. 꽃대가 조금 더 나오다가 가을쯤 떨구면 더 좋을 텐데... 꽃이 진 아기범부채는 어딘가 허전하다. 그 심심한 잎사귀 마저 노랗게 말라간다. 처음에는 내가 물을 안 줘서 죽는 줄 알았다. 그래서 겨우내 물도 안 주고 잊었었다. 엄마는 가끔 집에 오면 꼭 베란다에 화분들을 본다. 그리고는 "얘네 겨울에도 물 계속 줘. 그래야 봄에 또 나와."
오늘자 아기범부채
그렇게 우리 집 봄의 전령사가 되었던 아기범부채는 여름 한 철이 지나면 10월 즈음 다시 빼꼼 손을 내민다. 가을이 왔음을 알리는 손길 같다. 다른 식물들은 동면을 위해 잎을 떨구는데 아기범부채는 두 번째 봄을 맞이하며 생명을 틔운다.
그동안 키웠던 아기범부채들은 늘 새로 나는 진짜 아기범부채들이라 몸집도 작고 잎도 얇고, 겨우겨우 꽃대 하나 올려서 잠깐 피고 지곤 했었다. 한해만 살고 죽는다고 생각해서 겨울에는 관심을 주지 않아서 그랬던 거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기범부채에게 강한 생명력을 느끼곤 했다. 그렇게 외면당했는데도 기어코 싹을 틔워냈다. 엄마는 우리 집 범부채들을 볼 때마다 왜 이렇게 비실비실하냐며 아쉬워하셨다.
그러더니 올봄 엄마는 작정한 듯 십여 년 동안 이어서 키워 온 아기범부채의 새끼들을 나눠주었다. 확실히 엄마가 주신 아기범부채는 대가 굵었다. 사람으로 따지면 20대 같았다. 그동안에 내가 키우던 아기범부채는 아기였구나... 정말 신기할 노릇이었다.
그렇게 거실베란다에는 아기범부채 화분이 2개가 되었다. 비실비실하던 아기범부채만 보다가 싱싱하고 제법 화려하게 나온 아기범부채를 보니 기분이 좋았다.
매년 죽었다 살아난 게 아니었구나, 계속 크고 있던 거구나.
아니,
죽은 게 아니라 잠시 더 크고 건강해지기 위해서
겨우내 흙속에서 숨 고르기를 하고 있었던 걸까?
2019년 5월, 벚꽃 엔딩 끝자락 씨앗이었던 아기범부채가 첫 꽃을 피웠던 날. 근데 나는 그 꽃에 큰 의미를 부여했었다. 왜냐하면 그 꽃이 피고 2일 후 19일, 출산예정일날 아이가 태어났기 때문이다.
지금 그 아이가 9살이 되었다. 우리 엄마는 내년이면 칠순이다.
생각해 보니 아기범부채꽃은 대를 이은 반려식물이었다. 엄마가 처음 키운 날로부터 지금까지를 햇수로 치면 15년은 된 거 같다. 긴 세월 동안 아기범부채는 대를 이어 어느새 가족이 되었다.
유달리 올해는 벌써부터 꽃이 지는 게 아쉽다. 그래서 지고 나서 땅에 떨어지기 전에 내가 먼저 솎아 꽃무덤을 만들어 주었다. 가을에 다시 잎을 피워 추운 겨울을 오롯이 지내며 다음 봄을 기약하는 작은 생명에 대한 예의라면서..
꽃 하나로 이렇게 진지해지는 걸 보니 나도 이젠 꽃중년이구나 싶다. 꽃 좋아하는 중년으로 살면 진짜 꽃중년이 될 수 있을까?
영영 가을이 올 것 같지 않았던 2024년 여름, 뜨겁게 끓어올랐던 땅도 아침저녁엔 찬기가 올라온다.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늘 우리에게 두 번의 봄을 만들어 주는 범부채가 고맙다. 덕분에 올가을은 기분 좋게 타 넘을 수 있겠다. 다만 겨울은 조금만 늦게 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