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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나라 Dec 27. 2020

길에서 처음 만난 할머니랑 밥을 먹다니

작은 체구에 양손에 가득 든 짐꾸러미가 백미러를 따라옵니다.
힘들어 보여 태워 드렸는데 자꾸만 집으로 들어오라 간절히 부르셔서 마루에 걸터앉았지요.

마당 귀퉁이 키 큰 유자나무엔 노란 유자가 탱글탱글 매달려있어도
딸 사람이 없다며 필요하면 따가랍니다.
말대접 해드리려고 손 닿는데서 몇 개 따다가
가시에 찔렀어요.

욕심에 대한 경거망동을 주의하라는 것 같아
름 손 내리고 인사하고 나오려니
또 붙잡습니다.

오늘 그물에 도다리가 잡혔는데
금방 미역국 끓여줄 테니
한 그릇 먹고 가랍니다.

처음 보는데 이래도 되는 건가 싶어 사양했습니다.
할머니. 저 집에서 늦은 아점으로 식빵 두 조각 구워서 머그잔에 커피 가득 마시고 나와서 배 안고파요.

그래도 자꾸만 금방 끓인다고 '금방 끓인다'에 방점을 찍으시는데 내 마음이 왜 그러죠.
급한 일도 없는데 동무해드리라고
또 다른 내가 말을 시킵니다.

"그럼 끓여 주세요, 먹을게요."

할머니 얼굴에 둥근 햇살같은 꽃이 피더니 집안에서 기다란 줄기 미역을 꺼내와
수돗가에 쭈그리고 앉아서
바락바락 주물러야 부드럽다고
찬물에 손 담그는 것도 즐겁게 하십니다.

요즘은 오뚜기나 동원미역만 사 먹다가
아기 낳을 때 구경한 기다란 줄기 미역을 보노라니 신기합니다.
커다란 도다리를 도마 위에 올려놓고 요술 부리듯 손질하시는 거 넋 놓고 쳐다보며
말대답해드리는 사이에
할머니 손은 바쁘게 왔다갔다 하네요.

처음엔 노랑색이였을텐데 희끄므리한 은 냄비에 미역을 넣고 참기름에 달달 볶으시더니
끓여둔 다시물을 부어
미역이 끓어오르자
그제야 손질한 도다리 넣고 혼잣말처럼 말을 붙입니다.

'도다리살이 연해서 미역이랑 같이 끓이면 부서져서 나중에 넣고 끓여야 맛있다'고..

소박한 주방이지만 냄새만은 고급진 식당 못지않게 끝내주더군요.
주로 횟집에서 먹던 도다리 미역국이었는데
내 앞에 한 그릇 퍼다 놓고
살이 보드랍다고 권해서 도다리살 먼저 파 먹고
미역도 먹으라고 해서 입을 앙 벌리고 우적우적 씹고
국물까지 깨끗하게 클리어했습니다.

올챙이 배가 되어 원피스 앞자락이 부푸는데
할매가 도다리 알도 먹으라셔서
더 이상은 들어갈 데가 없다고 도리도리..
그래도 조금만 맛보라고 수저에 떠서 간절히 레이저를 쏘시길래 할수없이 앙~받아 먹었는데

아. 부드럽고 고소한 맛이 입안 가득 퍼지며 나도 모르게 목젖 뒤로 꿀꺽 소리까지 내고 말았어요.

내 얼굴에 코를 박고 쳐다보던 할매가
손뼉을 소리나게 치며 詩를 읊으십니다.

"방금 지비가 도다리 수천 마리 먹어브럿소."

하하..그래요? 오. 바다가 제 입속에 들어갔네요.
맞장구쳐드리니 환히 웃으시는 주름진 얼굴에
할매나이가 된 미래의 내가 보입니다.

평생 누군가의 입에 밥이 들어가는 게 행복이라 여기며 밥만 하다가..혼자 되면.. 혼자서는 귀한 밥 먹는 게 내키지 않아..   지나가는 길손 아무라도 반가워서 밥 먹자고 부를 것 같은..  

저 이렇게 처음 만난 할머니랑 친구하고 놀다가 왔어요. 배는 부른데 유자향은 코끝을 찌르고 눈꺼풀은 점점 콧등까지 내려 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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