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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인숙 Oct 20. 2024

48색 크레파스

크레파스 낙서를 지우 듯 마음속 상처를 지우다.

   

         

선아가 담임인 초등학교 1학년 미술수업 시간.

갑자기 교실 한쪽에서 가연이의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가연이가 가지고 온 가족사진에 유노가 크레파스로 낙서를 해놓았다. 낙서도 그냥 낙서가 아닌 눈, 코, 귀, 입을 이상한 괴물의 형상으로 만들어 놓지 않았나. 그러고는 히죽히죽 웃고 있다.


가족사진은 평소 가연이가 소중히 가지고 다니던 거였다. 부모님의 이혼으로 할아버지, 할머니, 아빠하고 살게 되었고, 할머니가 엄마하고 연락하는 것을 싫어해서 유일하게 가족사진만 할머니 몰래 가방에 넣고 다니던 거였다. 그것은 가연이가 유일하게 엄마를 생각하고 기억할 수 있는 물건이었다.

그런데 유노가 그 위에 크레파스로 낙서를 한 거다.

사진 속에 있는 낙서를 지워야 하는데 하고 고민하던 찰나, 크레파스를 보니 지난 추억이 떠올랐다.


초등학교 4학년인 선아는 검은색 단발에 쌍꺼풀이 있는 큰 눈과 예쁜 외모로 주위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아이였다. 담임선생님도 선아를 퍽 귀여워 해주셨다.


수업 시간에 소리 내어 책을 읽을 때도 선아를 자주 시켰다. 아이들 앞에서 칭찬도 많이 해줬으며 교무실 심부름도 선아 담당이었다.

친구들은 부러워했고 선아한테 잘 보이고 싶어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선아는 바쁜 부모님을 대신해 선생님의 가정방문을 맞이했다. 선아는 엄마가 일하다 말고 주머니에서 꾸깃꾸깃 준 돈으로 가게에 가서 간식거리를 샀다.


과자를 쟁반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고, 컵에 오렌지 주스를 담아놓은 후 선생님을 기다렸다. 혼자 오신 선생님은 집과 선아를 번갈아 보더니 많이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선아가 혼자 준비한 거니?” 하고 과자와 음료수를 드셨다. 잘 먹었다면서 더 열심히 공부하라는 당부를 하셨다. 그리고 다음 친구네 집에 가야 한다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가셨다.


그런데 그 이후부터 선생님은 하진이에게 더 많은 관심을 보이고, 칭찬과 교무실 심부름은 하진이한테만 시키기 시작했다.

 

하진이는 머리카락이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생머리에 눈은 크고 검정색 테가 있는 안경을 썼다. 안경의 렌즈는 때때로 빛을 받아 반짝였는데 하진이가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면 안경 렌즈의 반짝임이 더욱 차갑고 날카로워 보였다. 자주 화를 내고 성질이 사나워 주위에 친구들이 없었다. 하지만 미술학원을 다니며 그림을 잘 그리는 하진이를 볼 때마다 선아는 그 실력을 부러워했다.


어느 날 하진이와 선아가 짝꿍이 되었다. 같이 앉자마자 하진이는 책상에 자와 연필로 반듯하게 줄을 그었다. 선아도 하진이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신경쓰지 않았다.


미술 시간이었다. 선생님이 가지고 온 준비물을 꺼내놓고 있으라고 이야기한 후 잠시 교무실에 가셨다. 선아는 엄마가 사준 48색 크레파스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크레파스는 다른 아이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하진이는 크레파스를 보고 눈을 흘겼다. 대부분의 아이는 12색이나 24색 크레파스를 가지고 있었고, 그보다 많은 색이 들어있는 선아의 크레파스는 자연스럽게 주목을 받았다.

“와~ 색깔 진짜 많다. 나 구경해도 돼?”

“그래. 구경해”

윤정이가 선아의 크레파스를 구경한 후 하진이가 그려놓은 줄을 넘어가서 내려놓았다.


순간 하진이는 자기 책상을 넘어왔다면서 선아의 팔을 세게 때렸다.

“내가 넘어온 게 아니잖아!”

선아도 지지 않고 하진이의 팔을 힘껏 때렸다.

“네 물건이잖아!”

하진이는 선아의 머리카락을 움켜잡았다.

그러자 선아도 하진이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며 발로 차기 시작했다. 둘의 싸움은 점점 더 격렬해졌고, 책상이 흔들리며 의자가 넘어지기 시작했다. 선아와 하진이는 바닥으로 나뒹굴면서도 서로 머리채를 놓지 않았다.


주변 아이들은 놀란 듯 싸움 장면을 지켜보다가 이내 흥분된 목소리로 “이겨라! 이겨라!”를 외치며 둘의 싸움을 응원하기 시작했다.

교실은 금세 아수라장이 되었다.


선아의 마음은 그 순간 무너져 내렸다.

싸움 도중에 바닥으로 떨어진 48색 크레파스가 이리저리 구르며 몇 개는 반으로 뚝 끊어져 있었다. 선아는 마치 자신이 부서져 버린 듯한 느낌을 받았다. 새것처럼 반짝였던 크레파스가 형체가 일그러진 채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그것은 단지 물건이 아니라, 엄마가 힘들게 일해서 번 돈으로 사준 소중한 것이었고, 자랑거리였다.

그런데 지금 그 일부가 반으로 두 동강 나고 이리저리 굴러다니고 있는 것을 보자 가슴이 먹먹해지고 억울함과 분노에 눈물조차 흘릴 수 없었다.

싸움의 열기는 꺼지지 않았고, 교실은 아이들의 함성과 함께 혼란에 휩싸였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선생님의 외침과 함께 싸움은 끝이 났다. 선생님은 분노에 가득 찬 표정으로 교실을 정리했다. 분위기는 한순간에 싸늘해졌다. 반장이 상황을 설명하자, 선생님은 윤정이에게 잘못을 물어 손바닥을 때렸다. 윤정이는 울었고, 사건은 그렇게 마무리 지어졌다.


선아는 억울함과 분노를 느꼈다. 특히 크레파스가 부서진 것에 대한 자책감이 컸다. 선아는 더 이상 크레파스를 학교에 가져가지 않았다. 매일 아침 책가방을 챙기며 그 자리에 있어야 할 48색 크레파스를 외면할 때마다 씁쓸한 감정이 밀려왔다.


하진이는 여전히 선생님과 친구들로부터 많은 주목을 받았다. 하진이의 엄마는 학교 행사 때마다 선생님을 찾아와 선물을 주며, 하진이의 인기를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


몇 년이 지난 후, 고등학교 입학시험(예전에는 고등학교도 시험을 보고 합격하면 들어갔다.)에 하진이와 선아는 같은 여자고등학교에 지원했다. 학교와의 거리가 멀어서 가는 차편이 많지 않았다. 그런 상황을 알고 옆 동네 사는 하진이 엄마가 선아 엄마한테 선아도 자기네 차로 데려가겠다고 했다.


시험을 보는 날 선아는 엄마가 말해준 큰 느티나무 옆집으로 갔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운동화가 점점 더 무겁게 느껴졌다.

그때 처음 하진이네 집을 봤다. 옥상이 있는 2층 양옥집이었다. 선아는 하진이네 집 앞에 서서 잠시 망설였다. 하진이 엄마가 친절하게 차를 태워준다고 했지만, 막상 그 집 앞에 서니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던 찰나에 아저씨 한 분이 씩씩거리며 문을 박차고 나오고 있었다.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고, 눈은 살짝 충혈되어 있었다.

“그래. 그년이랑 잘살아 봐라!”

안에서 아줌마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선아를 보더니 아무 말 없이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묘한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여기까지 왔으니 돌아설 수는 없었다.

‘큰 느티나무 옆집 하진이네 집이 맞는데...’

망설이다가 그가 나왔던 대문을 조심스레 열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조심스럽게 내뱉은 말은 공허하게 흩어졌다.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다시 한번 숨을 고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대문에서 현관까지 이어진 작은 돌길은 고요했고, 양옆의 화분들은 정갈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자갈이 부드럽게 밟히는 소리가 신경을 더욱 곤두서게 했다. 마음속 불안을 억누르며, 조심스럽게 현관으로 향했다.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며, 다시 한번 말했다.

“안녕하세요...”

“어, 선아왔구나. 들어오렴”

하진이 엄마의 목소리가 거실 안쪽에서 들렸다.


적막이 흐르는 가운데, 거실의 넓은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갈색 소파는 두툼한 쿠션으로 아늑함을 자아내고 있었으며, 소파 맞은편 텔레비전은 목재캐비닛 위에 올려져 있었다. 한쪽 구석엔 피아노가 자리 잡고 있었고, 그 위에는 가족사진들이 나란히 놓여있었다. 주방의 중앙에는 커다란 대리석 식탁과 의자가 있었고, 그 위에는 깨끗이 닦인 유리병 속에 이름 모를 꽃들이 제각기 꽂혀 있었다. 거기서 하진이는 의자에 앉아 갈비를 먹고 있었다.

“선아도 아침밥 줄까?”

“괜찮아요. 저는 밥 먹고 왔어요”

공기는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고, 주방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소파 한쪽 구석에 앉아 하진이를 바라보았다. 하진이의 표정은 책상에 크레파스가 넘어왔다며 선아와 싸움했던 그때 그 표정이었다. 하진이는 마음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분노, 슬픔, 불안의 감정을 삼키듯 밥을 먹고 있었다.

선아는 하진이의 식사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예전에 느꼈던 불편함과 불안감, 억울함이 복잡한 이해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집안에서 들려온 부모님의 싸움 소리와 문을 박차고 나가는 분노에 찬 아저씨의 얼굴을 떠올리며, 하진이가 그런 환경 속에서 얼마나 힘들어 했을지 생각하게 되었다. 하진이의 차가운 표정 뒤에 숨겨진 상처와 외로움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어쩌면 하진이도 자신처럼 외로웠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아는 하진이를 미워하는 대신, 하진이도 자신처럼 사랑과 관심이 필요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선아의 마음은 한층 부드러워지며 하진이를 이해하고 싶은 감정이 생겨났다.     


지나간 추억을 떠올리며 선아는 어쩔 줄 몰라하는 유노를 바라보았다. 이혼한 엄마하고만 살고있는 유노는 가연이가 가족사진을 보고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고, 순간적인 질투와 억울한 마음에 자신도 모르게 그 사진을 망가뜨리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으리라.

그러나 그 행동이 가연이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줄 것인지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 듯했다. 유노의 장난은 그 아이가 겪고 있는 외로움과 자신이 갖지 못한 것에 대한 절망감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유노는 자신의 행동이 불러온 참담한 결과를 마주하고 진심으로 반성하는 모습을 보였다.


가연이의 가족사진에 그려진 크레파스가 조금씩 지워지기 시작했다. 같이 근무하는 박 선생이 아세톤과 면봉을 가져다줘서 사진의 낙서 부분을 천천히 지워봤다. 너무 세게 문지르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최대한 부드럽게 작은 동작으로 낙서를 제거해 나갔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낙서가 옅어지기 시작했다. 결국, 크레파스 낙서는 완벽하게 지워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처음보다 훨씬 나아진 상태로 복구할 수 있었다. 가연이는 사진의 흠집이 남아있긴 하지만, 이 순간을 교훈 삼아 더 소중하게 보관할 거라고 말했다. 가연이의 해맑은 미소가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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