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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블로프 Jul 03. 2021

2. 카르마 폴리스

홍준성 / 은행나무, 그러나 동전던지기는 진부해

0. 쟁점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디스토피아 장르에 대해 못다한 정의를 해보자. 일전에 필자는 이 장르에 대해 '기존 사회의 피해자들이나 할법한 증언'이라고 정의 내렸는데, 이 명제의 타당성을 증명하라 하면 그것은 반증의 부당함을 증명하는 것이 된다. 


 우선 피해자라는 개념이 매우 불명확하다. 어떤 인물을 두고 전적으로 피해자라 할 수 있을까? 행정기본법의 정의에 따르면 개인은 당사자적격이라고 하여 소송 청구에 있어 그 내용이 지닌 권리관계의 주체 만이 소송을 제기할수 있고, 그 개별 사실에 한정하어 피해 사실을 주장할 수 있다. 다시말해 어떤 행정처분에 있어 이익이 이 침해당한 개인만이 행정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법적 용어를 문학에 그대로 들이기는 곤란하다. 디스토피아에서 그 피해 사실은 중첩되는 경우가 많고, 무엇보다 대개 저자는 변호사가 아니며 독자는 판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다보니 이 매우 불안정한 행정 소송의 원고인은 결국 사회가 문제라는, 법리적 측면에서는 매우 비이성적인 주장을 하기 마련이며 이에 따라 평론이라는 판결문을 써내야 하는 독자들은 명확한 기준 없이 펜을 놀려야 하는 것이다. 저자가 죽고, 그 소설의 추종자도 거의 남지 않은 상황이라면 독자는 자기 생각이 결국 옳았다고 여기며 이제 발을 쭉 뻗고 잘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오스틴과 같은 명작의 경우 연구자라는 작자들이 떼거지로 몰려와서는 항고소송을 제기하기 마련이다. 저자가 올해 막 30살이 된 이 책의 경우에는, 비록 저자는 '독자와의 대화'를 강조하며 겉으로는 고개를 끄덕일지 모르겠지만, 저자가 직접 항고소송을 제기할지 모를 상황에서 나같은 초임 판사가 평론을 내리기란 매우 부담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그 독자의 나이가 스물셋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은 이 평론이 젊음이라는 패기로서 용서될 수 있음을 뜻한다. 그렇게 뻔뻔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글을 쓰겠는가.


1. 관할 법원

카르마 폴리스를 필자는 상기한 본인의 명제를 반박하는 데에 쓰고자 한다. 이를 위해 제시되는 반증은 '기존 사회의 피해자들만 그런 증언을 하는 것은 아니다'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먼저 카르마 폴리스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이 비뫼시에서 피해자로 지적될법한 인물을 추려보도록 하자. 단편적으로 떠오르는 인물들이라고 한다면 초반에 제시되는 인물들이자 '대홍수'에 수몰된 피해자들을 들 수 있겠다. 비뫼시의 일반 시민들은 관절염조차 제대로 치료받지 못할 정도로 노동에 시달리며, 이들에게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박쥐를 달여먹는 것과 같은 일종의 미신이다. 마른 박쥐를 푹 고아먹은 후 퇴행성 관절염이 치료되기를 바라던 유리부인에게 희망은 박쥐 꿈(태몽)과 임신으로, 그리고 현실은 그녀를 덮친 홍수로서 다가온다. 일반 대중은 '천고의 뒤에 백마를 타고 오는 초인'을 기다릴 수 밖에는 없는 것이다. 


2. 피고적격


 그 다음으로 이 홍수 사태와 같은 정부의 부조리로 인하여 하나 둘씩 사라지는 정부 관료들을 피해자로 들 수 있다. 비뫼시의 행정청들에게 유리 부인의 퇴행성 관절염 같은 것은 이미 논외의 대상이다. 



가뜩이나 아사직전인 교육 예산을 어떻게 하면 더 줄일 수 있을지, 브라운관 텔러비전의 생산량 규제를 풀 것인지, 하수도 정비 사업을 이번 년에도 보류할 것인지,다가오는 총선의 시나리오는 어떻게 짜여지고 있는지 등등
<카르마폴리스, 60p>


이런 불행들에 대해 취하는 행정청의 태도는 초 중기의 디스토피아 작품들(Machine Stops, A Story of the Days to Come 등) 에 비해 보다 노골적으로 나타난다.


가장 중요한 문제들을 결정짓는 최종 심급은 언제나 경제였기 때문이다... 해결책은 언제나 대규모 토목공사였다.
<카르마폴리스, 61p>

 카르마폴리스가 핵심적으로 짚고 있기는 하지만, 결국 모든 디스토피아 소설의 핵심은 이 한 문장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가시여왕의 책무란, 혁명이나 폭동 같은 극단적인 사태로 치닫지 않도록 위기를 관리해주는 것, 즉 도시를 견딜만한 지옥으로 유지하는 데 있었다.
<카르마폴리스, 62p>


물론 어느 사건에서든 사후적인 분석은 존재한다. 이를테면 부지선정을 제대로 했다면(삼풍백화점 붕괴, 1995), 재난관리법의 체계가 제대로 잡혀있었다면(세월호 침몰 사고, 2014), 기계장치가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의 범위를 명확하게 제한했다면(The Machine Stops, 1909), 시멘트의 양을 적절히 했다면(카르마 폴리스, 2020) 비극은 어느정도 예방될 수 있었다. 그러나 관료들에게 있어 이러한 사고의 예방은 논외 사항인 것이다.


"조금 이상하군". 그녀가 말했다. "댐에 이렇게 시멘트를 많이 부을 필요가 있나? 여기가 무슨 열대우림도 아니고, 비가 오면 얼마나 많이 온다고?" 일순간 회의장은 침묵에 휩싸였는데, 건설부 차관부터 그 밑의 관료들은 댐 설계에 대해서 아는 바가 전무한 문신(文臣)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주특기는 언변과 회계였지, 공학 계산이 아니었다.
<카르마폴리스, 64p>


"안전 기준이라... 하지만 그 기준이란 건, 어느 기준을 적용했느냐에 따라서 충분히 달라질 것 아니겠는가?" (중략) "그 계산이 맞을 거래두." 차관이 서둘러 말을 낚아채고는 덧붙였다. "좌우간 고생했네".
<카르마폴리스, 66p>



그리고 언제나 이 사고에 대한 책임은 실질적인 명령권자인 가시여왕이 아닌, 그 휘하의 공무원들이 지게 된다.


 "건축사가 한 것이라곤 명령에 복종한 것이 전부였지만, 삶을 끝장내기엔 충분했다." 
<카르마폴리스, 90p>
"이어서 덜덜 떠는 홀아비 차관에게 다가가 지금부터 자신이 불러주는 대로 유서를 적으라고 지시했다. 물론 그 내용은 사리사욕 때문에 볼더 댐 건설 자재들 중 일부를 빼돌리다 못해 설계도까지 마음대로 수정하고 말았다는 자백서였다." 
<카르마 폴리스, 91p>

3. 영웅

 이런 시궁창속에서도 비범한 배경을 지닌 영웅은 등장하는 법이다. 저자가 후일 후기에서 밝히듯 42번은 그야말로 배트맨의 화신이다. 여타 작품들과는 달리 저자는 관료주의의 대척점에 선 이들, 그러니까 무정부주의자들을 대안으로 내세우지 않고, 그대신 비범한 개인을 내세운다. 그러나 저자의 대선배격이라고 할 수 있는 헉슬리는 이러한 시도에 대해 후회하는데, 차라리 그 무정부주의자들을 대척점으로 전면에 내세울 것 했다는 것이다. 어쩌면 저자는 그 단계에 머물러있기를 택했던건지, 혹은 의도적으로 아무도 따라주지 않는 개인을 영웅으로 내세우기를 택했는지 독자로서는 판단할 길이 없다. 어쩌면 이 글이 저자의 눈에 띄어 답변을 받을지도 모르겠지만. 


 독자로서 내릴 수 있는 판단은 이러한 이념의 구분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작가가 포착했다는 것이다. 설국열차의 세계관이 그러하듯, 비뫼시의 무정부주의자의 집무실과 가시여왕의 궁전의 전화 회선은 직통으로 연결되어 있다.

Other people’s–not mine. It’s lucky,” he added, after a pause, “that there are such a lot of islands in the world. I don’t know what we should do without them.
<Brave New World, p254>
'별수 없이 잠깐 옛날로 돌아가야 겠네. 무정부주의자 놈들한테 연락해. 오랜만에 왕가의 부름을 받으라고......'
<카르마폴리스, p271>

 다시 말해 계급 분쟁 및 이념 대립이라고 하는 것은 사회적 비극을 숨기기 위한 일종의 기만책이라는 것이다. 크로프트킨의 자조론에 따라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유토피아란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그 Island는 뛰어난 개성의 집산물이라는 과학기술을 개발함으로서 Brave New World에 제공하는 방식으로 존속하고 있을 따름이다. 결국 island 역시 일반 인민대중을 착취함으로서 유지되는 사회에 불과하며, 이런 사회를 대안으로 내세웠다면 당시에는 어땠을지 모르겠으나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촘촘한 분석틀을 지닌 현시대의 독자들은 이 헉슬리의 장편소설을 일종의 삼류작품으로 분류했을 것이다. 결국 John이라는 오류가 Brave New World를 명작의 반열에 들게 하는 아이러니가 존재하며, 이러한 오류는 카르마 폴리스의 영웅에 그대로 반영된다. 물론 저자는 42의 모티브를 묻는 필자의 질문에 노코멘트라고 밝힌바 있다. 


 어쨌든 그렇게 등장한 영웅은 아무도 따르지 않는 범인(凡人)에 불과하다. 멋진신세계의 John, 클론 전쟁의 Fives, 그리고 카르마 폴리스의 42번은 이러한 정의에 부합한다. 심지어 42번은 이 사회에 반발의식을 제기하는 지조차 불명확하다. 그보다는 그의 반쪽 형제이자 가시여왕의 아들의 면모에게서 그러한 주제의식이 제대로 드러나는 편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카르마 폴리스의 영웅은 박쥐 그 자체이며, 그렇기에 42번에 대한 모티프를 묻는 것은 외려 불충분한 질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면 먼저 박쥐에 대해서 나름의 해석을 내려보도록 하자.


 박쥐는 포유류와 조류의 이중적 성격을 띄는, 동시에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속성을 지닌 동물이다. 이러한 메타포는 이후 배트맨, 드라큘라 백작과 같이 박쥐를 모티브로 한 인물상에 각기의 방식으로 차용된다. 이를테면 배트맨은 일반 대중의 입장에 서서 악인들을 처벌하는 영웅이지만, 동시에 형법 23조에 명시된 바에 따르면 공권력을 통한 적법한 절차가 아닌 사인(私人)으로서 자력구제를 행하는 범죄자이다. 이러한 이중적 성격을 포착하여 작가는 비뫼시만의 독특한 영웅을 만들어 냈다. 바로 42번이 유감없이 보여주는 지성과, 가시여왕의 아들이 보여주는 행동력의 중첩이다.


 4.

유리부인의 관절염 치료제였던 박쥐가 육화한 42번은 


"이렇게 기묘한 아기 얼굴은 처음 보는군. 꼭 코에 입이 붙은 것 같잖아? 또 귀는 왜 이렇게 뾰족한 거고..." 그가 신기해하며 42번에게 말을 붙였다. "얘야, 너희 어머니는 네가 배 속에 있을 때 박쥐라도 삶아 드셨나보구나."
<카르마폴리스, 111p> 


 그저 기존 사회에 순응한 인물에 불과하다. 그는 일찍이 사회에 나타나는 복잡한 변동을 알아차리고 이에 질려 독서라는, 비교적 가시석이 적은 분야에 침잠해버린다. 물론 열살을 막 넘긴 이 아이에 대해 그런 판단을 내리는 것은 외려 가혹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아이가 보여주는 지성은 명백하게도 현 사회에서 제대로 된 구심점을 잃은 채 방황하는 지식인들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절대로 있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이변이 벌어졌다. 42번은 쭈뼛쭈뼛 선 자리에서 딱히 막히는 구절 하나 없이 <욥기> 3장을 통째로 외워버리는 기염을 토해냈던 것이다...(중략)어느덧 P수사의 회초리도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중략)어릴 적 아버지를 따라 몇 번 회당을 오가면서 귀동냥한 것만으로도 경전을 통째로 외워버렸을 것이란 얘기를 들었던 것이 떠올랐다. 물론 박쥐처럼 못생긴 42번을 부활한 예수그리스도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우리의 주님이 이렇게나 추남일 리가 없잖는가?
<카르마폴리스, 133p>

 이것은 오히려 비극이다. 현 한국사회는 오히려 이런 기괴한 암기력을 일반 대중에게 요구하며, 그 대표적인 형태는 바로 수험이다. 일례로 공무원 9급 일반 행정 직렬의 시험 과목 중 하나인 행정법의 경우 현직 판사보다 수험생들의 점수가 더 높다는 말도 있으며, 실제로 9급 시험의 경우 두개 틀리면 위험하며 3개 틀리면 떨어진다는 괴랄한 암기력을 요구한다. 만약 그 수험 과목이 성경 낭독으로 바뀐다면, 그 과목의 수석생들은 대개 저정도의 암기력은 보여줄 것이다. 그러나 일반 대중의 본질은 42번이 아닌 실로 재수 없게도 그날따라 42번의 옆에 앉아있던 자그마한 남자아이, 즉 21번이다. 현재 공무원 시험이라 함은 1%의 42번을 솎아내기 위해 남은 99%의 21번에게 불합격이라는 회초리를 때리는 제도인 것이다. 


이윽고 그가 말했다. "너도 네 친구처럼 똑똑한지 보자꾸나. 같은 3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읊어보려무나."
<카르마폴리스, 133p>


그러나 42번의 경우와는 달리 대다수의 경우 이 선택받은 42번들은 대개 사회의 유능한 인재로서 99%의 21번들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아닌, 계층별 등급을 나누어 서로 급을 나눠놓고는 선택받지 못한 이들을 비하하기까지 한다. 대학서열, 이른바 서연고 서성한 중경외시라는 것이 그것이다. 이 대한민국의 1~9%의 인재군에 속하지 못한 개인은 이른바 '지잡대'생이 된다. 인재군에 속한 개인은 또다시 어느 학교는 분교라서 문제라느니, 어느 학교는 학비가 100만원밖에 안되는 거지대라느니 서로를 비방하게 된다. 보수 평론가들은 이를 긍정적인 무한경쟁사회의 한 례로 보며 흐뭇 할테지만 평등의 원칙을 강조하는 진보 평론가들은 이에 대해 기회의 평등을 운운하면서 그 인재군 밖에 있는 개인들에게 나름의 특권을 부여함으로서 또다른 분란을 조장한다. 그러나 모두 그러한 부조리의 본질은 파악하지 못한채 겉도는 것이다. 다시말해 출구가 없는 것이다. 이런 개인들을 본 John이 취했을 행동은 멋진신세계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42번을 이러한 메타포로만 취급하면 곤란하다. 42번이 비록 현실속에서는 수동적으로 끌려다닐지 모르겠지만, 그만의 세상속에서는 또한 주체성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인물이다. 오히려 이러한 모순이 현대의 지식인을 상징하는 것 아닐까. 


 5. 

 42번의 유리부인에 내린 축복이라면, 여왕의 '박쥐를 닮은' 아들은 가시여왕에 내린 저주일 것이다. 어려서부터 남자로 살것을 요구받아 남성 호르몬을 강제로 주입받는 등 온갖 고초를 겪은 끝에 왕위에 오른 그녀는 매우 냉혹하기 그지없는 인물이다. 그녀의 말이 곧 법으로 간주되는 사회에서 행정은 자연히 경직될 수밖에 없다. 의도했건 하지 않았건 그녀는 비뫼시에서 벌어지는 비극의 근원이자 동시에 그것의 피해자이기도 하다. 결국 그녀만은 구원받지 못하지만 그녀의 자손은 비뫼시의 문제 해결에 결정적인 실마리를 제시하는 인물이다. 물론 그것이 진정한 해결책인지는 의견이 분분하며, 이 부분에 대해서 여기에 서술하는 것은 소설의 내용을 스포일러하는 것이 될 우려가 있기에 그냥 독자의 판단에 맡겨두기로 한다.


 개인의 방황이라는 것이 42번에서는 표면상으로는 나타나지 않지만, 가시여왕의 아들 그러니까 철가면에서는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편이다. 보통의 인간이 42번처럼 현실에 실망하여 자신만의 세계에 침잠하는 반면, 철가면의 경우 이 구분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다시말해 미쳐버린 것이다. 그 광증의 해결책이 무정부주의자들의 폭탄테러와 그것에 따른 굉음이었다는 것은 그래서 상징적이다. 미친 인간은 촘촘한 체제에 구멍이 뚫려야, 다시말해 그 체제마저 돌아버려야 제 정신을 찾는 것이다. 대개 이러한 구멍은 체제를 존속시키기 위한 수단으로서 의도된 것이다. 이를테면 카르마폴리스에 나타나는 폭탄 테러는 가시여왕이 사주한것이며, '멋진 신세계'의 경우 야만인 존의 유입으로부터 생긴 혼란은 사실상 의도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만약 이를 막을 것이었다면 처음부터 입국을 막았어야 사리에 맞지 않는가. 공교롭게도 이런 의도된 혼란이 더 큰, 통제불능의 혼란을 낳기도 한다. 카르마폴리스의 경우 그것은 철가면의 등장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나는 왕좌엔 아무런 관심도 없어. 그저 내 어머니를 죽이고 싶을 뿐이야. 이 두 손으로 직접..."
<카르마폴리스, p310>

 그러나 왕실의 충견 파스칼리노는 이를 체제 존속의 연장선으로 이해한다.


"그 미친 녀석이 어머니를 죽이게끔 놔두자. 그리고 패륜으로 왕좌에서 끌어내려 지하감옥에 도로 가두고, 외척들 중에서 괜찮은 인물을 찾자. 아니, 그랬다간 외척들간에 싸움이 벌어질게 불 보듯 뻔하다. 그래, 내가 그 자리에 앉자. 그렇게 하는 수밖에 없구나. 지금 같은 시대엔 정신 나간 적통이 아니라 현명한 섭정이 필요하니까."
<카르마폴리스, p316>

 그러나 결말부에서 42번과 철가면은 재회하며, 이 비뫼시의 모순에 대한 나름의 해답을 찾는다. 그것에 나름의 대한 판단은 다른 독자분들게 맡겨두고 싶다.


6. 결론


 다시 본 질문으로 돌아오자. 본래 필자는 디스토피아를 정의내림에 있어 '기존 사회로부터의 피해자들이 하는 증언'이라고 하였는데, 카르마폴리스의 경우 이건 맞는 말이기도 틀린 말이기도 하다. 먼저 42번은 댐의 부실공사로 인하여 수장된 어머니 유리부인으로부터 태어나 사회 하층부에 위치한 고아원의 열약한 상황을 직접 목도했고, 비록 그가 직접적인 폭력의 대상이 되는 경우는 없지만 그의 시각을 통해 자신이 속한 사회의 부조리함을 증언하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위에서 서술한 유리부인, 건축사, 그리고 차관의 경우 작가는 악곡없는 간주곡 파트에 이들의 증언을 따로 할애하기까지 한다. 가시여왕이라고 하여 이 체제의 억압기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며, 그녀의 아들은 미쳤다는 이유로 독방에 수감되기까지 한다. 이들 모두 자신의 피해 사실을 증언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들은 자신이 피해를 가하는 대상에 대해서는 철저히 무감각하다. 가시여왕 처럼 아예 무관심한 작자가 있는 한편, 이를 오히려 즐기는 'P수사'가 있고, 이에 대해 변명을 하는 '차관'이 있다. 그렇다고 한다면 이들은 자신의 피해 사실에 대해 증언을 하는 동시에 자신이 가한 범죄에 대해 변호를 하는 것이 된다. 이것이 기존의 디스토피아의 정의가 놓친 부분이 아닐까 싶다. 단순히 이들을 피해자적 속성으로만 분류한다면 그것은 이들의 가해자적 속성을 배제하고 보는 것이 아닐까. 물론 법원의 경우 개별 사건이 소송 대상이 되므로 원고인은 어떤 행정처분에 한해서 만이 피해자가 될 뿐이다. 그러나 소설의 경우 피해 사실은 이보다 더욱 복잡하다. 각 등장인물들이 다른 인물을 착취하는 통에 동일한 항거 대상과 이를 위한 연대 의식같은 것은 바랄수가 없는 것이다. 카르마 폴리스에 들어서는 이러한 연대의식은 오히려 조롱되기까지 한다. 이를테면 불의(不義)한 정부 및 관료주의에 항거하여 결성된 이 무정부주의 단체라는 것은


'그러나 관공서에 폭탄을 던지는 일은...(중략)너무도 복잡했다...(중략) 자연스레 수많은 이음쇠들이 어긋나지 않게 죄어주는 중심이 출현할 수밖에 없었다...(중략)직무 수행은 원본 또는 초안으로 보관되는 서류에 의거해서 이뤄졌고...(중략)무정부주의 관료들 전체는 물적 재화 및 문서 장치와 함께 하나의 이른바 '무정부주의 관청 사무실'을 형성했다.'
<카르마폴리스, p282>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이 대항하는 적과 너무도 흡사한 모습을 보여준다. 멋진신세계의 대안으로 제시되는 사회는 어떠한가. 저자의 서문에 밝힌 '자조원칙'에 따라 살아가는 그러한 무정부주의적 유토피아는 적어도 island는 아니다. 이미 저자는 무스타파 몬드의 증언을 통해 그것 역시 기존 사회의 유지에 부역하는 집단에 지나지 않음을 밝히며 자기가 서문에 써놓은 내용을 스스로 반박하고 있다. 설령 그것에 대한 묘사가 있었다고 한들 무엇이 달라질까.


 마지막으로 결말부에 대한 짤막한 서술을 끝으로 이 글을 마치도록 하자. 에필로그 부분에서 다시금 제 몸뚱아리를 찾은 박쥐는 또다시 어디론가로 날아간다. 자신의 분신중 하나는 죽었고, 다른 하나는 자기가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님을 깨달았으니 유감없이 떠날 수 있는 것이다. 박쥐를 통하여 제시된 이러한 양면성은 마치 동전과 같으며, 이런식으로 처리된 결말에 대해 필자는 마치 작가가 동전을 던져놓고서는 그것이 앞면인지 뒷면인지 독자보고 맞추라는 식으로 요구하는 것과 다를게 없다는 인상을 받았다. 물론 하비 덴트와 안톤 쉬거와는 달리 저자는 최소한 독자를 향해 총구를 들이밀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답을 맞추기를 거부하고 책을 덮는다면 독자에게는 찜찜함만 남는 것이다. 이런 동전던지기는 진부하지 않은가 하는 의문을 남기며 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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