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스트라는 카뮈의 소설을 처음 접했던 것은 학교로 가는 지하철에서 였다. '이주민 자녀들의 정착'을 돕기 위한 일환으로서 설립된 한 소규모의 도서관에서 이루어지는 봉사활동을 지원하러 가는 길이었는데, 당시 내 마음에는 '교육봉사' 라는 그 번지르르한 구색과 봉사시간을 채운다는 속물적인 의도밖에는 없었다. 실질적으로 누군가를 돕는다는 그런 사명감은 없었던 것이다. 그때도 공무원을 나름의 진로목표로서 생각하고 있었음에도 그렇다. 물론 그때 내가 지망한다던 진로라는 것은 출입국관리직 공무원이라는, 그러니까 Paper Please에 등장하는 심사관과 그것이 지닌 추상적인 이미지에 기인한 것이었다. 몇시간이고 같은 자리에 앉아서 자국으로 넘어오려는 수많은 입국자들 가운데 예리하게 불순분자들을 가려내는 그 모습에 반한 것이었음을 나는 시인할 수 밖에 없다. 비록 이것은 요 근래 내 또래의 청년들이 공무원을 지망하는 대개의 목적과는 구별될지도 모르나, 돌이켜보면 나 역시 참으로 어리석은 생각을 하고있던 것 같다.
여하튼 이러한 연고로 당시의 내 독서는 그저 실적을 위한 독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독서 목록을 채우기 위한 독서인 것이다. 그야말로 본말전도이자 기계적 관료제의 병폐 중 하나인 목표대치의 전형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단어 몇 개를 시야에 들이고 나면, 이해 여부와 상관없이 페이지를 넘기고, 그런 식으로 독서를 해버리는 것이다. 그 결과 나는 내가 읽은 책에 대해 제목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말을 할 수 없게 되었다. 페스트는 공교롭게도 그런 방식을 통해 접했다. 그런 식으로 해서 얻은 교훈이란 것은 이 책을 소개해준 김영하 작가의 상투어 뿐이었다. 4월 16일에 일어난 이 오랑시의 비극이 동일에 일어난 팽목항의 비극을 보고 쓰여진 것 아니냐는 그런 경구들 말이다.
어쩌면 이는 기존의 관료주의가 나타내는 바와 맞물리는 행태같기도 하다. 일례로 관료주의의 시행으로서 야기되는 비개인화 및 법규만능주의는 개인의 독자적인 사유와는 대치된다. 공평무사함의 유지를 위해서 개인의 양심 및 타인에 대한 융통성은 희생되는 것이다. 그러한 태도를 가지고 독서에 임한다면 그것은 내 독자적인 사고를 이끌어 내기 위한 마중물이 아닌, 그저 '독서량'이라는 실적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고 만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이것의 극단적인 예시이다. 본인의 재판에서 그는 '자신의 판단은 칸트의 정언명령에 의거한 것이었다'라고 주장하는데, 아렌트는 이를 '칸트주의에의 유아적 활용 및 집착'이라며 신랄한 비판을 전개한다. 아이히만의 말에 따르면 그의 행동, 600만 유대인을 '해결'해버린 그의 잔혹함은 그가 속한 사회를 지배하던 법적 질서 및 국가이성에 의해 정당화된다고 한다. 자신은 그저 아돌프 히틀러의 명령을 충실히 따랐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아렌트에 따르면 칸트의 정언명령은 그 법칙의 발견자 및 수행자는 개인 그 자체가 되어야함을 주장하지, 타자의 원칙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다시말해 내가 봉사활동을 함에 있어 그것이 내면적 동기가 아닌, 그저 봉사시간을 채우기 위해 이루어진 다면 이에 대해서는 적어도 나는 칸트의 정언 명령에 따랐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아렌트의 이러한 분석에 따르면 칸트는 오히려 개인의 양심에 호소한 철학자이며, 아이히만은 (비록 내면적으로는 반발하였을지라도) 표면적으로는 그러한 개인적 양심은 뒷전으로 한 채 상관의 명령만을 맹목적으로 따른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분석을 근거로 아렌트는 국가의 악의 및 폭력성에 무덤덤해진 개인에 대해 유죄를 선고하며 '악의 평범성'을 주장한다.
이런 '악의 평범성'은 과연 나치의 붕괴로 영영 없어지고 만 것일까. 슬프게도 우리 시대는 이를 부정하기는 커녕 '악의 평범성' 에 대한 논의를 심화시킬 소재를 풍부하게 제공하고 있는 것 같다. 한발짝 뒤로 떨어져서 가만히 지켜보면 분명히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는데, '상관에 대한 예우'을 이유로, '성별'을 이유로, '국적'을 이유로, 그리고 '대학 수준'을 이유로 하여 행해지는 부조리함은 끊이지 않는 것 같다. 그리하여 고시 수석합격자는 우산 거치대로 전락했으며, 성별이 다르다는 이유로 술에 취해 쓰러진 사람을 그 자리에 놔둬야 한다는 것이 상식이 되었고, 나라 잃은 사람들은 테러범들이 되었으며, 부실대학으로 선정된 학교의 학생들은 저능아가 되었다. 사실 위에 나열한 그 기준 들로부터 조금만 멀어져 보면 우리는 위같은 행태가 정말 잘못되었음을 알 수 있고, 이에 대한 시정을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저마다의 이유로 우리들은이에 침묵하게 되었다. 공무원이야말로 이러한 제약에 순응하고 복종해야 하는 직업이다. 아이히만이 '악의 평범성'의 증거가 된 것은 우연만이 아닌 것이다. 그는 총통이라는, 국가적 권위에 가장 가까이 맞닿아 있어 일지감찌 저항의 가능성을 포기한 관료였던 것이다.
그래서 관료는 사회적 부조리함에 줏대없이 이끌려 살아야만 하는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관료주의에 대한 아렌트의 통렬한 비판을 뒤로하고 나는 우울한 감정을 가지고 공부에 임해야 했다. 갖가지 판례, 헌법 상에 규정된 기본권과 조리 원칙, 조직관리에 대한 다양한 이론들은 그저 무비판적으로 수용해야만 하는 대상이다. 이에 대해 고차원적인 생각은 허용되지 않으며, 그런 것을 할것이라면 차라리 대학원을 가라는 것이 세간의 조언이다. 공무원이라면, 특히 9급 말단 공무원이라면 윗사람들의 말씀을 한울님같이 여기며 이에 대해 봉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공무원에의 진로를 크게 고민했던 이유다.
이러한 고뇌를 하던 차에 다시 찾게 된 책이 바로 페스트였다. 이상적인 관료의 자질로 여겨지는 효율성과 능률성과 정반대되는 태도를 가지고 나는 이 책을 다시 읽었다. 독서가 그저 정보를 얻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면, 이러한 재독서는 정말이지 최악의 행위이다. 이미 카뮈의 실존주의 사상이 잘 드러났고 코로나 시대에 유의미한 성찰을 유도한다는 그런 분석 외에 도대체 뭐가 필요하겠는가. 그러나 나는 다시 그 책을 읽었고, 그제야 처음 날려 읽었을 때는 희미하게만 보이던 인간군상들을 제대로 살펴볼 수 있었다.
아이히만과 리외가 맞이한 딜레마는 분명 다른 성격의 것이다. 둘 다 신이 없는, 절대적인 원칙이 없는 세상 아래에서 저마다의 원칙을 찾아야 했다. 아이히만은 유대인에 대한 '물리적 해결'을 촉구하는 총통 및 국가권력의 말에서 그 원칙을 찾았다. 반면 리외와 그랑은 적극적으로 그 국가권력 및 행정력이 인간을 살리는 데에 쓰이도록 적극적으로 나선 사람들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사람들을 살린다'라는 내면적 동기를 위해 국가 조직에 헌신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끝내는 페스트의 마수로부터 본인들의 도시를 구원할 수 있었다. 특히 그랑의 경우, 말단 공무원이었을 따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위치에서 꼼꼼하게 맡은 바를 충실히 하며 동시에 자신만의 동화를 그려내는 그의 면모는 그야말로 눈물겨운 것이다.
나는 그랑에서 내 진로를 찾을 수 있었다. 물론 마음 편하게 내가 좋아하는 분야, 글쓰기와 음악에 전념하는 것도 하나의 방향일 것이다. 혹은 대개의 사람들이 그렇듯, 그저 평범하고 무난하게 살기 위해, 정년까지 제 삶을 무탈하게 영위하기 위해 공직을 지망할 수도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랑이 보여준 자신의 소명을 이루기 위해 공직에서 헌신하는 그 모습에 나는 감명받아 공직에의 길을 택하게 되었다. 이런 그랑은 부단 소설에서만 찾을 수 있는 존재는 아니었다. 지난 주 백신을 맞으러 갔을때, 적막한 강당에서 신속하고 질서정연하게 나를 비롯한 접종자들을 안내하며, 두꺼운 방진복을 입고 수많은 이들에게 주사를 맞히는 공무원들에게서 나는 그랑을 볼 수 있었다. 한국인 부대를 도운 아프가니스탄 인들을 신속하게 대피시킨 군인들에게서 나는 그랑을 볼 수 있었다. 비록 언론과 댓글들이 이들에 대해 온갖 유언비어를 자아내고 조롱하더라도 자신이 맡은 바를 묵묵하게 시행하는 이들에게서 나는 그랑을 볼 수 있었다.
이들에게 그랑과 같은 소명의식이 없었다면, 이들이 그저 단순히 자신의 양심을 억누른 채 공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이었다면, 이들은 그들만의 기적을 절대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이룬 기적이야말로, 내가 이들에게서 그랑을 본 것이 단순히 우연만은 아니었음을 증명한다. 그래서 나는 이 사회의, 또다른 그랑이 되기 위해 공직자를 지망하게 되었다. 또다른 그랑이 되어서, 보다 세상을 나은 곳으로 바꾸는 데에 나는 헌신하고 싶다. 그 헌신의 끝에 나는 짤막한 단편 소설만을 남겨놓고 싶다. 그랑이 그의 소설을 쓰는 데에 그랬듯, 오로지 나 자신만의 소명을 담은 그런 소설 말이다. 남의 언어가 아닌 오로지 나만의 언어를 찾기 위해 나는 공직을 지망하게 되었다. 개인이 억압받는다는 그 조직에서 역설적으로 우뚝 서기 위해 나는 공직을 지망하게 되었다.
향후 길이 엇갈려 내가 다른 길을 택하게 되더라도, 페스트에서 받은 그 감명은 내 가슴에 길이 남을 것 같다. 이 소설은 내가 택하게 된 길에 대해 그 무엇보다도 큰 응원이 되었다. 그 소설에서 표현한 잔잔한 지지를 끝으로 향후 사랑을 그려내겠다는 말 만을 남긴 채 작가는 최후를 맞았다. 그러나 김영하의 페스트에의 평이 그랬듯, 그는 우리네 사회에 대해 너무나도 뜻깊은 분석을 내렸다. 미래를 인용했다는 분석은 그래서 의미를 가진다. 그는 내가 카뮈를 처음 접했을 때처럼, 무미건조한 경구만을 가지고 글을 쓴 작가가 아니었다. 그는 살아있는 현실을 가지고 글을 썼고, 그래서 그의 글은 아직도 내게는 생생하게 느껴진다.
단순히 공무원 공부를 함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향후 공직에 입직하고 나서도 이러한 태도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비록 문서주의와 비개인화(공무 수행 시 개인적 이익이나 특별한 사정에 구애되는 일 없이 공평무사함을 요구하는 관료주의의 특징)가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랑이 그랬듯 그러한 경직성을 넘어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민의에 부응하는 공무원이 되고 싶다. 나는 이것이 나만의 글을 쓰기 위한 유일한 방법임을 믿고, 내가 지향해야 할 길임을 믿는다. 그렇게 해서 나는 내가 맡은 일에 충실하여 기적을 이뤄 낼 것임을 믿고, 그리하여 보다 나은 사회를 만들 것임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