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게 된 경위
파우스트는 내가 2년 전엔가 독서에 미쳐 있을 적에 잡이 읽었던 책 중 하나다. 당시 장만한 리디 페이퍼프로에 딸려있던 펭귄 세계문학전집 중 하나였는데, 다른 책들이 그렇듯 그 책 역시 '폭풍이 몰아치듯' 읽었다. 그 결과 머릿속에 남는 내용이 거의 없었다.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눈에 바르는 식으로, 그러니까 수험서 보듯이 읽었던 탓일게다.
이 책을 다시 접한건 독일어 및 철학전공자였던 전 애인이 가장 좋아하는 책으로 '파우스트'를 꼽으면서부터다. 읽어봐야지 다짐은 했지만 부담이 되어서 고전 영화를 보는 것을 제안했다. 유튜브에 무료로 풀려있던 흑백영화였는데, 대강 파우스트의 1부 내용을 다루는 극이었다. 그때 둘이서 많은 대화를 나눴던 것 같다. 이 내용이 책에서 나오는 내용이 맞느냐부터 시작해서, 영화 파우스트가 내린 결론에 대한 논의까지. 영화에서 대천사 미카엘로서 나타나는 '신'은 메피스토에게 다음과 같이 꾸짖는다.
돈과 명예보다 더욱 중한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바로 사랑이다!
신
그리고 그렇게 해서 파우스트와 그레트헨은 구원받는다는 결론. 애인은 이를 두고 대중 문화에 적합한 결론이라고 깠다. 원작 파우스트는 그보다 더 높은 차원의 결론을 내리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말을 들어보니 그 영화의 파우스트는 웃음이 나올 정도로 유치했다.
아, 그보다 먼저 파우스트를 접한 것 같다. 함께 칵테일 바를 간 일이 있었는데, 애인이 주문한 칵테일이 바로 '파우스트'라는 칵테일이었다. 술을 잘 못마셨던 나는 70도 가량 되는 높은 도수에 질겁했던 기억이다. 그 기억이 애틋하게 남았는지 나는 그 후 칵테일바를 찾을때마다 파우스트를 주문했다. 마치 그 사람이 그립다는듯이.
2. 작은 연애담
돌이켜보면 그사람은 바쁜 사람이었다. 철학과의 학석사 통합과정을 듣던 그는 월화수목금 내내 학회를 들었고, 주말에는 본가로 내려갔다. 서로에게 허락된 시간은 평일 저녁 뿐이었다. 그래선지 항상 서로에게 여유가 없었던 것 같다. 공무원 합격생 신분으로 시간이 많았던 나는 항상 그 친구에게 서운했고, 나중에 직장인이 되면 그친구를 어떻게 만나지 하고 항상 초조했다. 그 친구도 기어코 시간을 냈는데 그런 한숨 걱정을 듣자니 여러모로 서운했을 것이다. 서로의 잘못이 아닌 일로 우린 차츰 미안한 관계가 되었다.
아직도 미안한 것은 그 친구가 정말 힘든 일이 있었을때, 그때 잘 될거라고만 하고 제대로 위로를 해주지 못한 일이다. 후일 직장에서 그런 일을 겪고 나서 트라우마에 시달리면서도 마음 한켠엔 그 친구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는 미안함이 계속 쌓여있었다. 그 친구가 나중에 이별을 통보했을때, 나는 그저 그친구를 기다리며 내가 쏟은 시간이 억울하다며 온갖 못할 말들을 쏟아냈다. 이후로 어떻게든 사과하려 헀는데, 연락처를 잊어버렸다. 잃어버렸다. 그 친구와의 인연은 그렇게 끝났다.
그 친구는 왜 그렇게 열심히 살았을까. 노무사 수험을 하면서도 계속 꺾이는 나 자신을 보며 드는 생각이다. 적어도 파우스트를 다시 읽으며 나는 그의 행동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파우스트가 메피스토펠레스를 따라 취하는 행위는 선(善)과는 거리가 멀다. 젊고 순박한 시골 처녀 그레트헨을 본인 욕망에 따라 망가뜨려버리고, 그럼에도 계속하여 본인이 추구하는 아름다움을 찾다가 말미에 이르러서야 다른 사람들의 자유와 평등을 위해 노력해간다. 그런 선한 목적을 이루려고 노력하려는 데에서 파우스트는 끝내
순간이여 멈추어라, 너는 참 아름답구나
출처 입력
라고 외친다. 이를 통해 파우스트는 구원받는다.
3. 그럼에도 끊임없이 이어지는
그친구의 꿈은 '철학이 왜 필요한가' 라는 질문에 답을 하는 것이었다. 그친구의 질문이 아직도 마음속에 아프게 남는다.
철학을 하기에 돈이 없어서, 시간이 없어서 미루는 사람들을 봐. 그런데 다른 목적을 추구하면 행복할까?
당장 철학을 하면 행복한데, 왜 사람들은 그 행복을 유보할까?
출처 입력
내가 그 친구를 좋아했던 이유는 그런 유보를 택하며 도망쳐왔던 나와는 달리, 그 친구는 자기가 좋아하는 길을 따라갔기 때문이다. 내가 공무원이 된 것, 노무사 수험을 하게 된 것. 그것은 달리 말하면 많은 것을 포기하는 것을 통해 이루어졌다. 영어 공부를 위해 나는 피아노를 그만두어야 했고, 법학 공부를 위해 나는 기호학과 문학을 저버려야했다. 그리고는 공무원이 되면 여가시간에라도 그것을 충분히 할 수 있을거라면서 나를 착취해왔다. 지금도 나는 그 착취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어느덧 법학은 내가 추구해야 하는 길이, 내가 시간을 가장 많이 쏟는 길이 되었다. 그러니 나의 성공은 곧 나의 포기였다.
내가 아무리 철학 전공자들이 돈을 못번다느니, 예체능 졸업자들이 취직할 곳이 없다느니 자기위안을 해봤자, 결국 나는 이들이 추구한 행복에 이르지 못하고 절망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결국 사람들은 제 길을 찾아 간다는 것. 비록 그 친구는 돈을 많이 벌어 사람들을 돕지는 못하겠지만, 그 길을 꿋꿋이 걸어가 자기의 질문에 답함으로써 철학이 사람들에게 왜 필요한지 그 답을 내는 이타적인 목적을 이룰 것이다. 나 역시 노무사든, 공무원이든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서, 조금이나마 내가 살아가는 사회를 도와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포기가 아닌, 선택을 통해 사람들은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행복할 것이다. 그것이 내가 파우스트를 보며 내린 결론이다.
결론
결국 내가 안주해야할 것은 현재가 아닌, 보다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이다. 아무리 현재가 힘들게 느껴지더라도, 아무리 메피스토펠레스가 파우스트의 이상을 흐리더라도, 파우스트가 이상을 향해 노력을 멈추지 않듯이 나는 그런 희망에 대한 믿음을 굳건히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