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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섯 Oct 23. 2020

필름 2

바다를 담아내었어요



스쿠버 다이빙을 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바닷속을 찍는 것에도 관심이 생겼다. 23살 때 시작한 스쿠버 다이빙은 사실 대학생 신분으로 장비를 모두 장만하기에는 너무나 고가의 레포츠였다. 해서 마스터 과정을 거치기 이전, 어드밴스 다이버로 펀 다이빙을 즐길 때까지, 약 2년 정도는 대부분의 장비를 대여해서 사용했다. (핀과 마스크만 장만했다) 하지만 그 당시에 '대여'도 부담스러운 장비가 있었으니, 그게 바로 수중 카메라였고, 다이빙을 할수록 수중 촬영에 대한 욕심이 커졌던 나는 기어코 방수 하우징이 포함된 싸구려 토이 필름 카메라 하나를 장만했다. 대충 만 얼마쯤 했던 토이 카메라는 말 그대로 토이 카메라였기에 햇빛 확보가 관건이었고, 빛이 비교적 닿지 않는 깊은 수심에서의 촬영은 사실상 플래시 하나 없는 토이 필카로는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2009년 태국 여행길에 40m 방수가 가능한 저렴한 하우징을 씌운 토이 필카를 가져갔고, 그냥 필름 몇 통 날린다는 생각으로 마구잡이로 셔터를 눌러댔다. 바닷물이 조금 들어간다고 해도 비싼 장비도 아니니까. 그냥 버리지 뭐 하는 아주 가벼운 마음.


결과물은 의외였다. 물론 20~30m 수심에서 촬영한 사진은 시퍼렇고 어둡기만 했지만, 낮은 수심에서 촬영한 사진들은 해가 좋았던 덕분인지 제법 그럴싸하게 찍혔다. 플래시가 없는 탓에 화려한 바닷속의 색은 그대로 담아내지는 못했지만, 비록 푸르른 바다색을 머금었을지언정, 필카의 느낌이 매우 잘 살아있어서 꽤 그럴싸했다. 요즘 말로 '힙'한 결과물을 얻어냈다고나 할까.

 

4~6m의 낮은 수심에서 촬영한 사진은 이렇게 본연의 색 그대로 촬영되었다.

조악한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필름 카메라와 언제 침수되어도 이상할 것 없는 가벼운 플라스틱 하우징은 생각보다 바다와 잘 어울렸다. 아주 선명하고 깨끗한 화질의 사진은 아니었지만, '감성'으로는 먹어주는 사진이었으니까!

바닷속은 생각보다 훨씬 다양한 색으로 이루어져 있다. 자연이 이런 색을 만들어 낸다고? 싶을 정도로 화려하다.



래빗 피쉬. 그리 깊은 수심이 아닌데도 사진이 어둡다.

셔터스피드, 조리개 따위를 건들 수 없는 카메라가 담아내는 바닷속의 순간. 사진이 잘 찍히는지도 알 수 없고, 어쩌면 상당히 왜곡된 결과물일 수도 있는데, 요즘엔 이 감성이 그립다. 고프로와 수중카메라를 장만하면서 수중 필카 또한 완전히 잊고 살았다. 2009년과 2010년에 걸쳐 사용했던 그 카메라는 어디에 두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오로지 감성뿐인 사진이라, 사실 사진만으로는 그날의 다이빙 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고프로나 디지털카메라로 찍은 사진들은 순차적으로 기록이 되어 그날의 컨디션이나 상황, 감정 등이 비교적 쉽게 떠오르는데, 그에 비해 수동 카메라는 찍혀 나온 것 외의 정보를 떠올리는 것이 어렵다. 분명 순차적으로 찍혀있긴 하지만, 아주 특징적인 상황이나 수중 생물이 찍혀있는 것이 아니고서야 몇 번째 다이빙이었고, 어느 포인트인지 쉽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 로그북을 뒤적거리다 보면 대충 유추할 수는 있겠지만... 아무튼 나는 그 흐릿한 기억의 정보가 읽히는 이 필카로 찍은 수중 사진들이 좋다. 몽환적이고, 시간의 개념을 상실할 수 있을 것만 같고, 완전히 다른 세계로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다.


끊임없이 움직이는 물고기들이 빛을 가르면 그 빛에 물고기 비늘이 반짝여 또 다른 빛을 만들어낸다. 바닷속에서는 그 광경을 가만히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행복을 느낀다.

디지털 장비들을 마련하면서, 화질과 선예도는 더 좋아졌다. 쉽게 잡아내기 힘든 아주 작은 수중 생물들도 카메라에 담을 수 있게 되었고, 움직임이 빨라 순간 포착이 어려운 수중 생물도 영상으로 기록할 수 있게 되었다. 깨끗하고 화사한 색감도 그대로 사진으로 담아낼 수 있다. 탐내는 건 고가의 장비이면서 결과물에 대한 애정은 2만 원이 채 안 되는 필름 카메라로 담은 사진이라니. 너무 아이러니하고 웃기지 않나. 모처럼 꺼내 든 이 필카로 찍은 수중 사진들이 무중력과 고요의 바닷속을 더 잘 표현해 주는 것 같다. 가끔은 궁금하다. 나는 다이빙을 해 본 사람이라 사진을 보면서 바닷속의 고요 소리와 수중 생물들의 고단한 움직임을 느낄 수 있지만, 이 바닷속 환경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 이 사진들이 어떤 느낌일지. 이 정적이고 고요한 바닷속이 얼마나 깊게 느껴지는지.


고트피쉬. 마치 멈춰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얘네는 아마도 멈춰 있었던 것 같다(?) 왜냐면, 고트피쉬는 종종 그러고 있을 때가 있으니까(?)

디지털카메라의 경우, 전체적으로 푸른색이기만 하면 사진의 매력이 떨어지게 느껴진다. 수중 생물이 가진 본연의 색이 다 표현되지 않으면 그저 푸르뎅뎅해 보이기만 하고, 밋밋해 보인다. 반면에 필름 카메라는 푸른 끼가 돌아도 그 안의 음영이 살아 있기 때문인지, 표현되는 느낌이 상당히 다르다.






공기탱크에 연결된 호흡기를 통해 입으로 들이마신 공기는 내 폐에 채워졌다가, 다시 입으로 내뱉어진다. 호흡기 밖으로 뽀글뽀글 올라가는 버블.
푸질리어 떼. 이건 10~15m 사이 정도였던 것 같다. 아래에서 위로 올려 찍은 사진이라 역광의 느낌이 살아 있다.
가까이 다가가면 푸질리어 떼가 내 주위를 휘감는다. 사방이 물고기인 기분은 짜릿하다 못해 벅차오른다.
푸른 바다색도 수많은 푸질리어 떼도 너무 아름답다.
스쿨링 하는 푸질리어 떼를 조금 더 가까이에서 찍은 사진



모아서 보니 파란색뿐인 것 같지만, 다양하게 푸른 색감과 선명하지 않은 저 표현들 덕분에 완전히 다른 세계 같다. 한 탱크에 평균 40분 정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그 시간 동안 천천히 호흡하고 움직이면서 바닷속을 들여다본다. 저마다의 바다를 살아가는 수중 생물들을 지켜보면 아름답고, 신비롭다. 얼마나 길지 가늠도 할 수 없는 역사를 가진 바닷속을 아날로그의 카메라로 담아낸다는 그 사실 자체가 무척 매력적이다.

(하지만 나는 팔이 두 개뿐이고, 수중 촬영에 있어서 디지털과 필름을 선택하라고 한다면 디지털을 선택하겠지... 인간의 욕심은 감성보다 앞서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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