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족스럽지 않을 때. 이미 충분한 삶을 살고 있음을 감사하는 방법
봄을 알리는 소리가 아침부터 시끄럽다. 집 뒤편 작은 언덕에 겨우내 쌓인 낙엽들을 치우려 두 일꾼이 부지런히 바람으로 낙엽을 몰아간다. 잔잔하게 틀어놓은 음악이 요란한 기계소리에 묻혀버렸지만 괜찮다. 마른 낙엽 아래 놓인 새로운 싹들이 여린 푸른빛으로 인사를 하게 될 테니.
오늘따라 잔디가 샤워하는 소리가 시원하게 들리는 건 내 마음에도 세찬 바람이 캐캐 묵은 감정들이 날리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 일 것이다. 지금도 매일 질투, 부러움, 좌절, 절망, 짜증, 분노가 회전목마를 타고 한 번씩 돌아가며 등장하는 탓에 내 마음에 햇살들 날이 없다. 돌아보면 지금과 비교도 할 수 없이 숨만 겨우 쉬던 날들도 있었는데 내가 원하는 때에, 내가 원하는 일을 하고 있는 지금도 변함없이 내 삶이 만족스럽지 못했던 이유는 무얼까.
만족의 영어단어 Content의 어원은 ‘담는다’는 라틴어이다. 듣는 순간 아- 하는 짧은 탄식이 나온다. 만족의 근원은 소유에서 나온다는 관념을 단어로 만들어내다니. 옥스퍼드 사전의 단어 트렌드에는 2000년대 이후 이 단어의 사용 빈도가 가파른 상승곡선을 이루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온라인 시대에 content가 만족이라는 뜻뿐 아니라 사람들에게 만족을 주는 내용을 담은 ‘무엇’으로 사용되기 시작했기 때문인데, 우리는 온라인에서 더 많은 것들을 담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박탈감을 느끼는 세대가 되었다.
하고 싶던 일들에 조금씩 근거를 채워 겨우 용기를 내어 이제 무언가 시작하려는 엄마들이 하나같이 말하는 것이 ‘잘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똑똑하고 센스 넘치는 엄마들이 너무 많아요.’ ‘나는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같은 말이다. 정말 그러하다. 센스와 실력으로 무장한 엄마들이 어쩜 그렇게 똑소리 나게 아이들도 잘 키우고 일들도 멋지게 해 나가는지 감탄스럽다.
나는 그런 부류가 아니다. 제대로 배운 것도 없고 밥 먹고 살려니 익힌 잔재주로 겨우 여기까지 왔다. 그래서 차곡차곡 실력을 쌓아온 사람들을 보면 뭐 깎아내릴 것 없나 찾아보고 저 사람을 이래서 그렇다 단정 지어 버리는 지질한 사람이다. 만족이란 언젠가 열심히 살다 보면 이루어질 목표라 생각하고 온 힘을 쥐어짜며 달렸는데 돌아보니 내게 남은 건 심술궂은 라테는~을 운운하는 아줌마가 있을 뿐이었다.
다행히 나에겐 엄마가 물려주신 신앙이 있어 그것을 붙들고 버텼다. 매일 내 삶의 행복에 맞추어져 있는 기준선을 하나님의 뜻이라는 기준선으로 바꾸는 노력을 하며 말이다. 이 기준선을 바꾸기 위해서 내가 하는 노력은 티타임이다. 한잔의 차를 마시며 나의 한계와 부족함과의 마주하는 가운데 내가 처한 현실들을 마주한다.
나는 아이들을 정말 사랑하지만, 아이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줄 수는 없구나.
나는 일에 집중을 하고 싶지만, 지금은 엄마로서 해야 할 일들이 우선순위에 있구나.
하나씩 마음을 적어 내려가다 보면 잔뜩 긴장되어 있던 어깨가 풀리고 마음에 화가 가라앉는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 내 삶에 허락하신 (고전 10:13) 나의 영역을 보듬는 시선이 만들어진다. 나의 현실의 그릇만큼의 만족의 그릇이 만들어진 후에는 이곳에 담을 것을 찾는다. 아이들이 건강한 것,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꿈꿀 수 있는 것, 모자란 사람이라 실패담을 들려줄 일이 더 많다는 것, 평안을 구하는 마음이 내 안에 있다는 것. 가진 것과 조건에서부터 시작되는 일차원적 감사가 점점 마음으로 옮겨와 나의 존재의 감사로 안착한다.
매일 아침 한 시간을 꼬박 들여 정성스럽게 이 시간을 지키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오랜 시간 일에 급급해 살면서 이제야 제대로 실천하게 된 이 시간을 통해 보이는 것들에 빼앗긴 마음을 제대로 일할 수 있는 자리에 가져다 놓는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빌립보서 4:19)
그런다음 감사로 바뀐 나의 현실은 한계에서 머무르지 않고 한 발짝 나갈 용기를 구한다. 새롭게 새워진 만족의 기준을 채워줄 풍성한 능력들이 영을 살찌운다. 일을 하다 보니 왜 그렇게 스티브 잡스 같은 세계적인 비즈니스 리더들이 바쁜 와중에도 ‘영적인 생활’에 관심을 기울였는지 조금 알 것 같다. 마음을 챙기고 비워진 생각에서 나타나는 나오는 능력을 직관력이라고 하는데, 마음을 다스리는 영혼이 하는 일은 이성적 사고가 만드는 실력의 한계를 뛰어넘는다. 아주 작은 경험이지만 매일 용기가 필요했던 나는 그 말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 같은 삶을 살았다. 혹 나는 힘들어 죽겠는, 아이를 기르며 집에서 일하는 것이 다른 사람이 보기엔 참 쉽고 잘하게 보인다면 그것은 내가 한 일이 아니라 그 안에 일하시는 성령님이 일하시는 모습이 그러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내가 잘하는 일은 못하는 일이 될 수도 있고, 안 하게 될 수도 있다. 일은 어떻게든 변한다. 하지만 그 일 가운데 성령님이 맺어가시는 열매는 변하지 않는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 5:22)
미국에 와서 10여 년의 시간 동안 엄마에서 어린이 사역자로, 디렉터에서 간병사로 운전수로 또 프리랜서로 계속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나의 역할과 일은 변해왔지만 그 시간은 한결같았다. 내 안에 오래 참음의 열매가 만들어지는 시간이었기에. 그 열매가 일을 만들어 가고 있었기에 내가 무엇이 되어가는 것은 내 만족의 척도가 되지 않는다. (아니 되지 않을 것을 믿는다)
혹 오늘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보잘것없게 느껴지는 누군가가 있다면 고민하여 애쓰는 그 시간을 살아내는 것 만으로 세상이 만들어 낼 수 없는 열매를 만드는 시간일 거라고 이야기해주고 싶다. 그리고 그 시간을 지켜보는 누군가의 마음에서 열매가 일하고 있을 거라고 그렇다면 나는 알지 못하지만 이미 만족스럽게 오늘 하루를 살아낸 것이라고 말이다.
햇살이 너무나 좋다. 아무 조건 없이 세상을 가득 채우는 저 에너지에 몸을 맡기고 찬찬히 내 숨을 느껴보면 좋겠다. 일하고 있지 않아도 내 안에 일하는 이에게 그저 몸을 맡긴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