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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니스 Mar 25. 2024

오빠 덕분

체육 중학교 갈 뻔했다

"체육 중학교에 가는 게 좋겠다.”

“네?”

“기숙사에 속옷까지 나라에서 몽땅 지원해 준대”

“전 안 갈래요. 공부할 거예요”

국민학교(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과의 대화다. 오빠 덕분이다. 두 살 위 오빠가 6학년 때 체력장을 하고 와서 4학년, 2학년이던 여동생들에게 맹훈련을 시켰다.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승부욕이 강했던 오빠가 체력장을 못했을 리는 없고 여동생들을 훈련시킨 건 책임감이었나 보다. 방바닥 장판의 금을 기준으로 넓이 뛰기를 연습했던 기억이 아직까지 생생하다. 당연히 처음으로 접하는 체력장에 우왕좌왕 실수 연발하는 친구들 사이에서 단연 독보적으로 우수한 기록을 거두었다. 내막을 모르는 담임선생님 눈에는 내가 요즘 말로 하면 체육 영재쯤으로 보였나 보다. 2년 후 여동생도 던지기에서만 10점을 감점받아 120점 만점에 110점을 기록했다. 작고 마른 체구라 개미나 멸치가 별명인 막내의 선전에 가족들도 깜짝 놀랐다.

남동생이 없음을 늘 아쉬워했던 오빠는 우리를 꼬셔서 전쟁놀이도 하고 치고받고 싸우기도 많이 했다. 그때는 괴로웠지만 야생화나 불도저 같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강하게 클 수 있었다. 대학 때는 남자 선배들이 "너는 남자였으면 크게 성공했겠다"는 칭찬인 듯 칭찬 아닌 감탄을 하기도 했다

뭘 해도 끝장을 보고 몰입하는 오빠였다. 구슬치기를 해도 온 동네 구슬을 다 따야 직성이 풀렸다. 다 딴 후 최고임을 확인하면 미련 없이 친구들에게 구슬을 나눠 주었다. 딱지는 말할 것도 없었다. 매일 따놓은 구슬과 딱지를 세어 대서인지 오빠는 수학을 잘했다. 이과 수학을 만점 받을 정도였다.

오빠는 집요했다. 하루 종일 메뚜기를 잡다가 해 질 녘에야 돌아와 엄마의 걱정을 듣기도 했다. 한 번은 땅강아지를 잡아왔다. 너무나 신난 오빠는 신기한 곤충관찰을 동생들과 같이 하고 싶어 했다. 만져보라는 오빠의 말에 우린 기겁했다. 절대 만지지 않겠다는 나에게 한 시간여를 부탁했다. “정말 부드러워, 한 번만 만져봐” 땅강아지의 배 부분이 그렇게 부드럽다며 간청했다. 절대 포기하지 않을 오빠였다. 눈을 질끈 감고 만져 보았다. 마지못해 만졌기에 유쾌한 순간은 아니었지만 ‘땅강아지도 만져보다니’ 친구들에게 말해줄 새로운 모험이었다.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선명한 추억이다.

오빠는 사마귀를 키워 보겠다고 라면 박스에 흙을 깔고 풀과 돌로 예쁘게 꾸미고 위는 비닐로 덮고 숨구멍을 뚫은 후 관찰하기도 했다. 나와 동생은 오빠의 부하가 되어 무슨 대단한 미션을 수행하듯이 비닐봉지를 도구 삼아  종일 파리를 잡았다. 사마귀는 살아있는 곤충만 먹는다고 해서 신중하게 파리를 생포했다. 더운 여름 어찌나 열심히 잡았던지 오빠가 고마워했다. 파리 잡는 실력이 좋아지자 구석기 원시인이 사냥에 성공했을 때 느꼈을 것 같은 성취감도 만끽했다. 사마귀가 파리를 먹는 장면은 다큐멘터리 ‘동물의 세계’ 못지않았다. 오빠가 아니었다면 겪어보지 못했을 일이다.

이제는 자주 보지 못하지만 오빠생각은 늘 한다. 둘째 아들이 오빠를 많이 닮아서 더 그렇다. 둘째의 얼굴을 보면 오빠의 어릴 적 모습이 떠오른다. 외모만이 아니다. 수학을 좋아하는 것도 닮았다. 심지어 뭐 하나에 꽂히면 끝장을 보는 성격도 그렇다.


평면 퍼즐로 시작해서 입체퍼즐, 종이접기, 레고, 만들기, 로봇, 요요, 큐브를 거쳐 요즘은 카드 마술에 빠져있다. 큐브 6면을 맞추는 사람은 내가 어릴 땐 우리 집에서 오빠뿐이었고, 지금 우리 집에선 둘째뿐이다. 큐브 공식을 외운 후 밥을 먹을 때도 TV를 볼 때도 쉬지 않고 몇 날 며칠을 연습하더니 손가락 관절이 아프다 면서도 멈추지를 않았다. 그렇게 해서 최단기록 35초에 6면을 다 맞춘다. 공식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뭔 말인지 모르겠는 나에게는 도대체 왜 손가락이 아프도록 몰입하는지 그 마음을 알 수가 없다. 어렸을 때 오빠의 집중력에 놀라곤 했는데 둘째도 그렇다. 유전자의 힘인지 놀라울 정도로 닮은 두 사람이다.

중고등학교 시절엔 종종 언니가 있었다면 좋을 텐데라고 생각했다. 언니가 꼼꼼하게 코치해 주는 친구들을 보면 부러웠다. 지금 돌이켜보니 내 인생에 오빠는 오늘의 나를 있게 해 준 고마운 사람이다. 공부를 잘했던 오빠가 항상 자랑스러웠고 사회에서도 잘 나가는 기업들을 거치며 인정받는 오빠는 우리 집의 자랑이다.

아빠는 내가 다섯 살 때 돌아가셨다. 그런 나에게 오빠는 두 살 밖에 차이 나지 않지만 참 큰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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