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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버톡 주인장 Nov 14. 2023

아픈 내 부모, 누가, 어떻게 돌봐야 하는가? 첫 번째

효심이 아니라 시민의식으로 돌본다

그때는 불효, 지금은 효도

 “제가 지금 40대 중반으로 미혼이고 엄마와 같이 사는데요, 얼마전 이모들을 만난 자리에서 다들 제가 시집을 안 가서 다행이라고 하는 거예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결혼 안 한 게 세상 제일 큰 불효인 것처럼 뭐라 하시더니 이제는 제가 독신으로 살면서 엄마 돌보는 일을 당연하게 생각하더라고요. 현타를 맞은 기분이었죠.”

최근 한 모임에서 만난 여성의 이야기다. 지금이야 엄마가 독립적인 생활이 가능하지만 점점 적극적인 돌봄이 필요한 상황이 될 텐데, 자연스럽게 엄마의 노후를 자신이 책임져야 하는 입장이 되었더란다. 들으면서 저절로 고개 끄덕끄덕. 


유유상종인가? 어쩌다 보니 내 주위엔 미혼이나 이혼 등 혼자 사는 여성이 유난히 많은 편인데, 그들 중에도 비슷한 상황에 놓인 경우가 적지 않다. 달라졌다고는 하나 한국 사회에서 중년 이상의 나이에 여자가 비혼인 상태로 사는 게 그리 녹록한 일은 아니다. “아니, 나 혼자 사는 데 누구 보태준 사람 있어? 나라에서는 연말정산 때도 맨날 돈 토해내라고 하더니, 가족들은 혼자 사니까 돈 많이 모아 놓지 않았냐며 가족 행사에도 은근 나한테 더 기대하는 눈치야.” “그 나이에 왜 결혼 안 했냐고 묻는 쌍팔년도 상사가 있다니까.” “병원에서 수술을 받는데 아직 대학생인 아들이 보호자 사인을 하는 걸 보니 속이 상하더라고.” 지금보다 조금 더 젊은 시절, 친구나 후배들과 나눴던 이야기다.


이제 자신의 건강도 걱정해야 하는 중늙은이가 되었는데, 그동안 아파도 고파도 혼자 견디며 살아왔는데, 이제 와서 혼자 사는 딸들이 부모 돌봄의 당사자로 당첨되는 분위기다. 아이를 다 키우고 주부로서의 의무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기혼 친구들도 부모의 주돌봄자 역할을 하는 경우를 자주 본다. 이때는 시부모들에게도 에너지의 일부를 나눠 쓰기도 한다. 


나는 좋은 돌봄자가 될 수 있을까?

나도 육아를 도와주던 엄마와 함께 살다 보니 자연스럽게 엄마의 주보호자가 되었다. 혼자인 딸과 사는 우리 엄마는 비교적 처지가 괜찮은 편이다. 연세에 비해 건강이 괜찮으시고 경제적으로도 별 부담을 주지 않으시니, 내 입장에서도 그럭저럭 모실 만하다. 무엇보다 내 신경을 크게 분산시킬 일이 없는 단출한 가족관계도 도움이 된다. 물론 끊임없는 동어반복과 확고한 자기 주관에서 오는 까칠함을 견디기 어려울 때면 내 목소리에 짜증이 묻어나는 건 디폴트 값이지만.... 


어찌됐든 머지않아 간병을 하거나 경제적인 부담이 커지거나 내 일상에 심각한 지장을 받는 상황이 올 가능성이 높다. 그럴 때 나는 좋은 돌봄을 제공할 수 있을까? 동생들에게 화를 내지는 않을까? 시설이나 병원이 아닌, 집에서 엄마를 돌볼 수 있을까? 선뜻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오래 사는 일이 축복이 아니라 재앙으로 여겨지는 세상이다. 오래 산다는 일은 필연적으로 치매든 골절이든 각종 노환이든 건강하지 않은 상태로 지내야 하는 기간이 길어진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 기간을 견디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몸과 마음과 시간과 돈이 필요하다. 어느 정도는 공적인 영역의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해결책이 되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부모의 상가에서 나누는 우리의 인사 '잘 가셨다'

지금 당장 노부모의 병환으로 힘들어 하는 친구들을 꼽아봐도 열 손가락이 모자란다. 90세 엄마가 거실에서 넘어져 허리 수술 후 퇴원, 판교에서 김포 엄마 집으로 출퇴근하는 친구, 코로나는 치료됐는데 면역력 약화로 갑자기 섬망증세를 보이는 아버지를 요양병원에 입원시키고 뒷바라지에 바쁜 친구, 심장 이상 증세인 엄마와 병원에 동반 입원 중인 친구, 강원도에서 혼자 사는 엄마의 초기 치매 증세로 CCTV를 달아 놓고 한밤중에도 차로 달려가는 후배, 엄마의 오랜 와병으로 가족 갈등이 심각해진 후배, 요양원에 면회 갈 때마다 집에 가는 거냐고 아이처럼 좋아하는 아버지를 외면하고 나오는 후배, 본인도 얼마 전 심장 스텐트 시술을 받았는데, 파킨슨병에 걸린 아버지를 돌보는 친구, 네 자매가 돌아가며 요양보호사와 함께 와상환자인 엄마를 집에서 돌보는 친구 등등. 리스트는 얼마든지 길어질 수 있다.


부모의 상가에서 만난 우리들은 ‘잘 가셨다’는 말을 입 밖에 내곤 한다. 얼마 전 선배 엄마의 상갓집에 조문을 갔을 때 선배는 고통 받는 엄마를 빨리 데려가시라고 화살기도를 드렸더니 정말 3일 만에 돌아가버리셨다며 눈가가 빨개졌다. 


그래도 이건 대체로 형편이 좀 나은 축에 속한다. 내 주위는 돌봄의 당사자가 대략 5, 60대로 은퇴한 경우도 많고 경제적으로도 중산층은 되는 편이기 때문이다. 돌봄의 당사자가 아직 젊어서 직장생활과 육아를 함께 해야 하는 경우나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일 때는 고통의 정도가 질적으로 다르다. 특히 치매 부모님을 둔 아들딸들의 사연은 듣는 것만으로 가슴이 답답하고 힘이 든다.


옆집 할머니한테 하는 정도로 친절하기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아프면서 오래 사는 부모 잘못도 아니고, 그런 부모 때문에 고통 받으며 ‘언제쯤 돌아가실까’라는 질문을 무의식 저 밑바닥에 밀어 넣는 자식 잘못도 아니다. 경험해 보지 않은 거대한 문제 앞에서 우리는 매뉴얼도 가이드라인도 없이 우왕좌왕하고 있는 중이다. 효자문이라도 세워야 할 것 같은 정말 효심 깊은 자식부터 심적으로 물리적으로 부모를 학대하는 자식까지, 그 층위가 넓고 깊다. 


그 중간 어디쯤에서 헤매는 나의 최선은 ‘효심이 아니라 시민의식’으로 엄마를 돌보겠다는 마음이다. 어차피 효심은 소유해본 적이 없기도 하거니와 핏줄이니 천륜이니 하는 끈끈한 관계에 이상하게 거부감이 있다. 그보다는 평생을 고생하며 살아온 늙고 힘없는 할머니, 사회적 약자인 노년층을 친절하게 대하겠다는 마음을 기본으로 하고 거기에 내 엄마라는 사실을 얹는 정도면 적당할 것 같다. 일정 거리를 유지해야 감정 소모도 덜 하고 관계가 오래 갈 수 있는 법이다. 사실 엄마한테 짜증을 내거나 속이 상하는 상황의 상당수는 ‘우리 엄마’라서 이다. 같은 말 반복하고, 틀린 걸 우기고, 기껏 끓여낸 국 대신 맹물에 밥 말아 먹고, 엘리베이터에서 반려견 품에 안은 사람을 못마땅한 눈초리로 쳐다보는 사람이, 이웃 할머니가 아니라 우리 엄마라서 잔소리와 싫은 소리가 나오는 것이다. 


옆집 할머니에게 친절한 정도로 우리 엄마에게도 친절하자! 일단 그 정도면 충분하다. 너무 심한 거 아니냐고? 한집에서 같이 사는 딸들이라면 엄마를 친절하게 대하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이해해주리라 믿는다. 아냐? 아니라고? 아님 말고...


*다음 편에는 주위의 사례에서 살펴본 지극히 주관적인 ‘아픈 부모 돌봄의 하우투’를 전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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