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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버톡 주인장 Oct 22. 2023

엄마와 나, 그리고 돈 봉투

돈이 인간의 무의식에 남기는 깊은 존재감

엄마가 주는 돈도 불편하다고? 

평생 내 생활비 내가 벌어 썼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기혼여성이라면 많던 적던 남편의 수입을 받아봤겠지만, 나는 짧은 혼인생활 중에도 혼자가 된 이후에도 그런 경험이 없다. 그렇다고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친정 형편이 넉넉할 리 없다. 다행히 몸은 고단했지만 안정적인 일을 오랫동안 할 수 있었던 덕에 경제적 독립을 유지하고 살았다. 내 팔다리 내가 움직여 내 생활비 내가 벌어쓰면 되지 뭐. 이런 잘난 척도 좀 하면서 말이다. 


퇴직을 앞두고 계산기를 이리저리 두드렸다. 긴 직장생활 끝에 쌓인 퇴직금과 통장 잔고로 버티다 국민연금으로 갈아타면 대충 최소 생활비는 해결할 수 있겠다는 계산이 나왔다. 그래서 초기에는 백수 주제에 잘난 척 고고한 척. 보훈 연금을 받으시는 엄마가 아파트 난방비에 보태라고 봉투를 주시는데 받기가 싫었다. 평생 내가 벌어 내가 써온 때문인지 엄마한테 그런 돈을 받는 게 이상하게 불편했다. ‘이제 벌이도 없는데 난방비에 보태고 내 방 난방은 아끼지 말라’는 엄마의 멘트가 빈정 상하기도 했고, 동생들이 내가 엄마 모시면서 생활비라도 받아 쓰는 줄 오해할까 싶은 결벽증도 작동했던 것 같다. “됐어. 나도 아파트 관리비 낼 돈은 있어!” (이제 와 나의 쓸데없는 자존심 통렬히 반성 중).


늘 그렇듯, 앞날이 계획대로 될 리 만무하다. 시간이 많아지니 놀 일이 많아지고, 예정에 없이 냉장고며 에어콘도 새로 사야 하고, 목독이 들어갈 상황이 생겼다. 잔고는 예상보다 빠르게 줄어들었다. 그사이 알바 등을 하면서 그럭저럭 경제적 문제를 해결해갔고, 자연스럽게 엄마의 돈봉투를 대하는 나의 태도도 달라졌다. 은근히 기대하며, 공손하게, 감사하게! 


엄마의 기억력 장애가 돈 봉투에 미치는 영향

엄마의 돈 봉투에는 무규칙 속의 규칙이 있는데, 기억력 장애는 여기서도 발휘된다. 일단 엄마가 돈을 찾아야겠다는 마음을 내면 은행을 모시고 가야 한다. “요즘 지갑에 돈이 없네. 통장에 돈 넣어두면 뭐하니? 돈 찾아서 나도 쓰고 너 생활비도 쓰고 해야지.” 또는 “곧 추석인데 돈 좀 찾아서 필요한 데 써야지.” (오! 좋은 생각.) 그런데, 나도 요즘 출근을 하다 보니 낮 시간에 바로 은행 나서기가 쉽지 않아 며칠 지체되곤 한다. “엄마, 오늘은 은행 가야지. 준비하고 나가요.” “내가 요즘 절에도 잘 안 가고 돈 쓸 일이 없는데 돈은 찾아서 뭐하게?” “아, 은행 간다며?” 


어찌저찌 모시고 가 출금전표를 쓰면 신기한 게 비밀번호를 한 번도 잊으신 적이 없다. 숫자를 물어보면 한 자리도 기억 못하면서, 창구에 앉으면 정확하게 비번을 누르시는 것이다. 확실히 머리가 아니라 손이 기억하는 것 같다. 아마 저 숫자 자판의 배열을 바꾸면 기억이 엉켜버릴 게다. 은행을 다녀온 날은 하루종일 돈을 세고(네네. 액수가 커서가 아닙니다.) 통장을 들여다보신다. 같은 동작 반복. 그러다 찾은 돈의 딱 절반을 주시면서 생활비에 보태라고 하신다. “네에~ 잘 쓸게요.” 저절로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게 된다. 


그 다음날 저녁이면 내 책상에 또다시 돈이 놓인다. 어제 찾아서 자신의 몫으로 가져가신 1/2 금액의 다시 1/2이다. 본인 지갑에 돈이 많으니 나한테 주신 걸 기억 못하고 또 주시는 거다. 인출 금액이 크면 이런 과정이 한 번 더 있기도 하는데, 대략 30~50만원 정도가 엄마 자신에게 허용된 최대치 보유 금액인 것 같다. 처음에는 어제 주셨다고 돌려드리기도 했지만 결국 더 헷갈려하시면서 같은 행위 반복이라, 요즘은 모르는 척 또 받아버린다. ‘내가 받아서 조카들 용돈도 주고 필요한 데 쓰면 되지 뭐’ 굳이 마음 속에 꼬리표를 붙이면서.


그렇다고 엄마의 기억력을 허투루 여기면 안 된다. 어느 날 보니 엄마는 통장 빈 공간에 나에게 준 돈을 모두 메모해놓으신 게 아닌가. 심지어 인출 금액 전액을 나한테 준 걸로 되어 있었다. 아니, 이런 억울한 일이 있나! 억울한 김에 돈이나 자주 받으면 좋겠네!~


돈과 관련된 의심에는 왜 더 감정적이 되는 걸까?

사실 이건 웃으며 넘어가는 에피소드다. 엄마는 연금이 들어오는 통장과 목돈을 넣어둔 통장이 하나씩 있는데 갑자기 “내 통장 너한테 있지?”라고 하실 때가 있다. 아마도 엄마 머릿속에 각인된 통장 넣어두는 곳(첫번째 서랍 바닥)에 손을 넣어보신 것 같다. “아니야. 엄마 가방 보세요. 거기 들어 있을 거야.” “무슨 가방? 내가 가방에 통장을 넣어둔다고? 너한테 줬잖아!!” 엄마 목소리가 높아지고 덩달아 내 목소리도 하이톤이 되고 만다. “아이, 참. 안 가지고 있다고!! 내가 찾아드릴게” 


자신은 맨날 통장 찾아 헤맨다고, 나한테 맡기신 적이 딱 한번 있었다. 바로 그 다음날 통장이 안 보인다고 해서 내놓았더니, 통장을 왜 맘대로 가져갔냐고 화를 벌컥 내시는 게 아닌가. 기억을 못 해서 그런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짜증이 솟구쳐 나도 모르게 큰소리를 낸 적이 있다. 그 이후에는 무조건 ‘엄마 스스로 보관 원칙’을 고수 중이다. 가끔은 엄마가 어디 두었는지 몰라 난감해질 때도 있지만, 여러 번의 경험을 통해 대략 보관 장소가 스캔 가능해 문제는 해결된다.


두어 달 전에는 예전 폐기 통장 귀퉁이에 ‘은숙한테 통장 보관’이라는 자필 메모를 남겨 나까지 헷갈리게 했다. 물론 본인이 기억 못하는 자작극. 글자 안 보이게 빡빡 지우라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며칠 전 또다른 귀퉁이에서 동일 메모를 발견하고는 대략 난감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엄마가 일부러 그러는 것도 아닌데, 통장 못 찾으면 다시 만들면 되는데,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다. 돈과 관련해 의심 받으면 필요 이상으로 언짢아지는 마음은 돈에 그만큼 휘둘리고 있다는 증거 아니겠는가. 


사실 돈이나 물건에 의심이 많아지는 건 대표적인 치매 초기 증세다. 자식을 의심하고 집에 오는 요양보호사를 도둑으로 모는 일도 드물지 않다. 엄마는 통장이 눈 앞에 보이면 문제가 해결되는 경증인데도, 일단 기분이 상하고 만다. 사람은 왜 인지기능이 떨어져도 돈에 집착하는지, 그런 부모에게 의심 좀 받았다고 짜증을 내는지... 돈의 중요성이 뼛속 깊이 아로새겨져 있는 걸까? 인간, 참 허약한 존재다. 


심지어 나는 엄마에게 가끔 보너스를 받으면서도 디스하다니, 스페셜하게 못 났다. 

못나도 좋으니, 엄마에게 봉투 하사의 기회를 더 자주 주고 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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