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는 자아에 대해 알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그 끝에서 만난 건 ‘어린 시절의 나’였다. 현재의 나를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어른이 된 후에도 여전히 붙들고 있는 어린 시절의 나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어린 시절의 나를 놓아주어야 비로소 나는 나로 살 수 있다. 타인에 대해서도 그렇다. 눈앞에 있는 성인의 너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에게 남아 있는 어린 시절의 그를 봐야 한다.
“아이를 이해하는 것은 인간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한 가정이, 사회가, 국가가 아이를 어떻게 대하고 어떻게 다루고 어떻게 교육하고 어떻게 존중하느냐가 결국은 그 가정이, 사회가, 국가가 사람을 보는 시각이라고 생각합니다.(p5)”
자녀가 있든 없든 상관없이 우리 모두는 금쪽이일 수 있다. 제대로 사랑받지 못하고 자랐기에 지금의 내가 이렇다고 말하기보다는 제대로 사랑받지 못하고 자랐‘지만’ 나는 나의 아이를, 내 사랑이 필요한 누군가를 제대로 사랑해 ‘줄 수’ 있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다.
# 불안을 읽다
“한번 틀을 바꿨는데 크게 손해 본 것 없이 괜찮았던 경험, 원래 정한 대로가 아니라 다른 방법도 취할 수 있다는 경험, 누구에게나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기고 그것이 일상의 안전을 깨지 않는다는 경험 (...) 불안한 아이는 이런 경험을 늘려주어야 해요. 아이의 불안을 인정해주고, 조금씩 틀에서 벗어난 상황을 만들어 아이가 조금씩 나아질 수 있도록 돕는 겁니다. 아이가 고집을 피우는 이유는 틀에서 벗어난 상황이 안전하지 않다고 느끼는 거예요. 그 상황이 안전하다는 것을 빨리 느끼게 해주는 것이 가장 좋은 해결책입니다.(p149)”
인생은 불확실성이기에 이를 포용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나로 살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여전히 난 그게 어렵다.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가끔씩 반항하고 싶어진다. 나는 왜 그게 어려운가를 생각하곤 했는데 어쩌면 ‘불안’인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정해진 길대로 갈 수 없는 건 알면서도 내가 예상하지 못한 길은 나를 불안하게 만든다. 불안이었던 것이다. 그럼 이 불안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가. 경험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원래 정한 대로가 아니라도 다른 방법도 있으며 그렇게 가도 충분히 안전하다는 경험. 만약 나의 아이가 고집을 부린다면 그 고집을 고집의 행위 자체만 좁게 보는 것이 아니라 넓게 볼 수 있길 원한다. 아이를 위해 읽는 책에서 나를 배운다.
# 용서를 읽다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사과를 해야 사과를 했다고 생각해요. 사고의 융통성이 떨어지고 자기중심적인 겁니다. (...) 늘 자신의 억울함만 중요한 거예요.(p154)”
용서가 어려운 이유는 어쩌면 이것이 아닐까. 자신이 정한 기준대로, 자신이 정한 방식대로 해야만 그게 ‘진정한’ 사과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저자는 단호하게 말한다. 그건 ‘자기중심적’인 사고라고. 내가 화를 내는 것이 타당하고 당연하며 그래서 나는 옳다고 믿었던 것들도 어쩌면 다른 관점에서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보아야 한다. 너무 단단하게 묶어둔 끈을 조금만, 아주 조금만이라도 느슨하게 풀고 세상을 보면 세상은 조금 더 살 만해질 것 같다.
# 감정을 읽다
“아이를 정서적으로 편안한 사람으로 키우고 싶다면, 가장 좋은 방법은 아이의 마음을 잘 읽어주고, 아이를 기본적으로 존중해주고, 아이의 말을 귀 기울여 듣는 겁니다.(p313)”
나의 아이에게 주고 싶은 것 중 하나는, 감정을 읽는 법이다. 울면 안 되는 세상에서 아이를 살게 하고 싶지 않다. 어른에게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것이 말대꾸라고 하고 싶지 않다. 슬픔과 같은 마이너스 감정은 숨겨야 하는 것도 아니고, 슬픔이 분노나 화도 아니라고 알려 주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이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나는 내 아이를 누구보다 잘 안다고 믿으며, 묻지 않아도 된다고 착각하지 말고, 무엇이든 묻고 들으려 해야 한다. 이건 내가 몇 살이 되어도, 아이가 몇 살이 되어도 기억해 두고 싶다. 내 몸에 새겨두고 싶다.
“아이의 스트레스에 자꾸 개입하는 부모는, 스트레스는 무조건 나쁜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거예요. 그래서 없애주고 싶습니다. 없애려고 하다 보니 너무 많이 개입해버려요. (...) 부모의 감정은 부모의 것, 부모가 견뎌내야 해요. (...) 마음의 어려움은 알아주되, 해결해주려고 하지는 마세요.(p409)”
또한 내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지나치게 아이에게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이가 사랑스럽고 너무나 예쁘고 소중해서 아이의 감정마저 내가 해결하려고 할 것만 같다. 분명 난 잊어버리고 그러다 후회하고 반성하곤 하겠지만 그럼에도 또 다시 아차, 하며 다시 아이에게 ‘올바른’ 사랑을 주기 위해 정신을 차리고 싶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책을 읽는다.
# 단지 부모가 되다
육아 관련 도서나 방송을 접하다 보면 이러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잘못이다, 큰일난다, 등 부모의 역할이 엄청 많이 적혀 있다. 일부 부모답지 못한 사람들도 뉴스에 나오긴 하지만 대부분의 부모는 아이들을 자신의 목숨보다 더 사랑하고 아낀다. 자신의 방식으로 다들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래서 그렇게 노력하는 사람일수록 책이나 영상을 접할 때 더 괴로워진다. 나는 잘 하고 있어, 라는 안심보다는 부족한 부분들만 보이기에 어깨에 힘이 더 들어가고 스스로를 자꾸 더 채찍질하게 된다. 이런 부모들에게 저자는 말한다. 체육 교사도 되지 말고 멘토가 될 필요도 없고 훈련소 교관도 될 필요가 없다고.
“부모는 단지 부모가 되려고 했으면 좋겠습니다.(p414)”
아이가 조금이라도 더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에 아이를 지나치게 채근하기도 하고 단점이나 문제점이 보이면 그걸 해결해주려고 모진 부모가 된다. 물론 그게 전부 틀린 건 아니다. 하지만 지나치게 어깨에 힘이 많이 들어가게 된다. 그러면 아이도 부모도 힘들어진다. 아이는 부모에게 사랑과 보호를 받고 싶은 것이지 채찍질을 받고 싶은 게 아니다. 부모에게 받고 싶은 것은 객관적인 비판이나 판단이 아닐 것이다.
“아이에게 너무 많은 것을 해주려고 하지도 말고, 너무 많은 역할을 하려고 들지도 마세요. 아이가 너무 많은 것을 이루기를 바라지도 말고, 부모로서 아이에게 대단한 위치에 서려고 하지도 마세요. 바라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편안해지고 마음이 든든해지는 아름드리나무, 그런 나무가 되려고 하세요. 그 무엇도 아닌 단지 부모가 되려고 하면 됩니다.(p415)”
아기가 태어나서 약 한 달간은 정말 여리고 약하다. 혼자 트림도 못해서 부모가 몇십 분 동안, 계속 등을 두들겨 줘야만 한다. 질병에도 취약해서 외부와의 접촉도 조심스럽다. 몸집만 작은 게 아니다. 아기를 세게 잡으면 부서질 것만 같다. 그저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자라주기만 해도 충분히 감사하고 웃어주기만 해도 삶의 무게와 근심이 사라져버린다. 그런데 인간이란 참 우습게도 이런 감정이 오래가질 못한다. 아이가 건강하기만을 바라더니 아이가 건강하게 잘 자고 잘 먹고 있으면 또 건강하기만 하다고 욕심을 부리게 된다. 아이를 향한 첫마음이 어느 새 사라져 버린다.
아이도 자라지만 부모도 처음부터 부모가 아니라 아이와 함께 부모가 되어 가는 것이다. 그래서 배워야 하고 생각해야 하고 반성해야 한다. 아이를 바라보며 아이의 마음을 읽고 아이의 필요를 읽고 아이와 ‘함께’ 부모가 되어 가야 한다. 그래서 어렵다. 사랑하지만 제대로 사랑할 줄 몰라서 어렵고 쉽게 초심을 잃어버려서 어렵다. 어렵지만 해야 한다. 아이를 사랑하니까, 아이를 제대로 올바르게 사랑해주고 싶으니까. 그게 부모의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