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과 함께 한지 15년 만인 2021년 어느 날 대인기피증으로 연결된 번아웃이 찾아왔다. 이대로 있다가 내가 위험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2021년 12월 31일 퇴직을 하겠다고 결심했다. 이후 장작처럼 몸을 불태우며 일했고, 지금은 퇴사한 지 2년 10개월이 됐다. 직장을 구해야 하는데, 50살이 넘고 보니 이직이 쉽지 않았고, 학력과 경력을 생각하니 눈에 차는 직장도 마땅치 않았다. 우왕좌왕하다가 아르바이트부터 하기로 결심했다. 여의도에 있는 어느 직장 어린이집에서 보조교사로 근무를 시작했다. 오랜만에 만난 아가들과 마주하니 시름도 잊고, 웃을 일만 가득했다. 행복한 순간들이 이어지던 어느 날 나에게 예상치 못한 시련이 찾아왔다.
내가 근무했던 교실은 영아가 9명, 주임교사 1명과 신입 교사 2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교사 1명 당 영아 3명을 돌봐야 하는데, 말도 안 되게 힘들다. 하지만 나처럼 보조교사도 있고, 시에서 파견된 인력들이 배치되어 있어서 서로 도와가며 아가들을 잘 돌봤다. 교사들의 합이 무척 중요한 교실에서 이제 갓 전문대를 졸업하고, 입사한 22살짜리 신입 교사 A가 나에게 친절한 갑질을 시작했다.
"선생님, 일을 처음 하시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하시면 안 되죠"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선생님은 빠지세요."
오랜만에 보육현장에 다시 온 건 맞지만, 기관의 지침대로 따르고 있었다. 그리고 난 아동학 박사를 졸업했고, 강의도 하고, 경력은 말할 것도 없이 많은데.. 감히 이따위로 해? 처음에는 억울하고 울화통이 터져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건 나의 오만이었다.
다른 두 명의 선생님들과 배려하며 잘 지내고 있는데, 왜 그러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고작 22살인 애랑 감정싸움해서 무엇하리! 어른인 내가 이해하고 넘어가야지..' 생각하며 지내던 중 사건이 터졌다.
유독 날씨가 화창했던 날, 걸을 수 있는 아가 2명 손을 잡고, 걷는 연습을 하거나 못 걷는 6명의 아가들을 유모차에 태우고 산책을 나갔다. 유모차 3개가 줄줄이 이어졌고, 줄 끝에 아가들은 선생님 손을 잡고 아장아장 따라오고 있었다. 길 끝에 다다른 곳은 야트막한 언덕이었다. 언덕에 올라서 유모차에서 아가들을 내려줬다. 내려줌과 동시에 "와"하고 소리를 지르더니 뿔뿔이 흩어졌다. 선생님들은 익숙한 듯 아가들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그리고 남은 건 나와 A였다. 유모차에 아가 1명씩 있었는데, 굳이 둘이서 유모차를 끌 필요가 없으니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선생님, 가서 애들 보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제가 애들 두 명 유모차에 태우고, 산책하다가 이따 합류할게요."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나를 흘겨보던 A는 "내가 할 테니 선생님이 애들 쫓아가세요." 어이가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감정 낭비를 하고 싶지 않아서, 아이를 A 유모차에 옮겼다. 그때 주임 교사가 아이를 안고 오더니 A에게 말했다. "선생님 여기서 뭐해요? 애들 맡기고, 빨리 가서 선생님 반 애들 봐요."
나한테 눈 흘기며 날 선 태도를 보일 때는 세상 당당하더니, 주임 교사 앞에서 찍소리도 못 하고 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통쾌한 마음이 들었다. 한편으로 '내 앞에서 얼마나 부끄러웠을까?' 생각하니 오히려 짠하기까지.. 그러나 부질없는 생각이었다. 친절함 속에 감춰진 A의 날카로운 갑질은 더 심해졌다.
나참.. 더럽고 치사해서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하는 법.. 결국 내가 그만뒀다. 30년 가까이 직장 생활하면서 처음 겪어본22살의 친절한 갑질.. 직장 생활 참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