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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생각하면 성추행

퇴사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by 퍼플슈룹

대학입시를 실패한 직후, 깊은 좌절에 빠져있던 내게 손을 내밀어준 건 고3 담임선생님이었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야? 컴퓨터도 배우고, 외국어도 배워 둬! 선생님이 취직자리 알아봐 줄게."


20살, 지금 생각하면 창창한 나이인데 대학 진학에 실패한 난 절벽 끝에 선 것처럼 위태로웠다. 선생님이란 희망의 불씨를 붙잡고 1년을 보냈다. 이후 선생님 소개로 단출한 인테리어 회사에 출근하게 됐다. 근무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사장님이 날 불러서 이런 말을 꺼냈다.


"우리 형이 건설사를 운영하면서 이번에 작은 신문사를 인수하게 됐어. 거기 비서실에 자리가 하나 났다네. 옮길 생각 있니?"


뜻밖의 제안이었다. 얼떨떨했지만, 감사한 마음으로 수락했다. 비록 지방 신문사였지만, 지역을 대표하고 있어서 나름 인지도가 있었다. 21살, 나에게 희망이란 무지개가 떠오른 것 같았다.


5층 사옥에 비서실은 3층에 있었다. 임원분들, 동료들과 인사를 나눴다. 다행히 일도 재밌고, 사람들이 좋아서 잘 적응하며 3년 넘게 일하던 어느 날,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나 부서이동 해. 환실로 갈 거야. 미안하게 됐다."

사수 언니의 뜬금없는 말.


가지 말라고 애걸복걸 붙잡고 늘어졌지만 냉정하게 가버렸다. 이유도 모른 채 그렇게 헤어졌고, 후임이 들어왔다. 졸지에 사수가 된 나는 사장님과 마주할 일이 잦아졌다. 그러던 어느 날 오후, 결재를 받기 위해 사장실로 들어갔다. 이야기를 마치고 나오려는데, 사장님이 날 불러 세웠다.


"어이, 잠깐."


지시사항이 있는 줄 알고 기다리던 나를 벽으로 밀치더니 두 팔로 감싸 안았다.

"주말에 뭐 해? 우리 만날까?"


놀라 고개를 들었는데, 사장님이 웃고 있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빨리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에 두 팔로 있는 힘껏 밀어버리고 탕비실로 뛰어들어갔다. 흥분한 마음을 가다듬고 있는데, 나를 따라온 후임이 괜찮냐고 연신 물었다.


"미안한데 여기서 잠깐 쉬고 있을게요. 사장님이 찾으시면 언니가 가 줄래요?"


당장 때려치겠다고 마음먹었던 그 순간 부모님 얼굴이 스쳐가는 건 뭐람. 비록 지방신문사지만, 비서실에 근무하는 딸을 자랑스러워했던 부모님께 뭐라고 말해야 할지... 이 일을 말할 자신이 없었다. 퇴직해야 할 명분을 찾던 중 때마침 대학 합격 통보를 받았다. 퇴사의 명분이 되어줬다.


사직서를 내고 사장님과 마주했다.

"지난번 그 일 때문에 그만두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무섭고 두려웠고,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그리고 퇴직할 때까지 사장실에 들어가지 않았다. 다행히 동료 언니는 건드리지 않았다. 아마도 언니 아버지가 고위관직에 있었기 때문이라 추측한다.


속 좋게도 난 퇴직 후에도 회사에 종종 놀러 갔다. 그 일만 아니었으면 계속 회사를 다녔을 만큼 직원들과 사이가 좋았기 때문이다. 회사에서 가장 자유로운 교환실이 아지트였다. 언니들이랑 수다 떨던 중 내가 퇴직한 이유를 말하게 됐다.


"어린 너한테까지 그런 짓을 했어?"

그날 내 사수였던 언니가 교환실로 올라간 이유를 듣게 됐다.


사장님이 운영하는 건설사와 신문사 비서실 직원들 회식자리가 있어서 나갔는데, 사장님 혼자 있어서 돌아가려고 했던 언니. 하지만 밥 먹고 가라는 말을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어서 차를 탔는데, 거기서 성추행을 당했다고 했다. 바로 뛰쳐나갔고, 퇴사를 할 수 없었기에 참고 다녔는데, 이후로 몇 차례 더 비슷한 추행이 있어서 부서 이동을 요청했다는 것.


그런 일이 있었으면 나한테 이야기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소리쳤더니,

"설마 어린 너한테까지 그런 짓을 할 줄 몰랐지."


충격을 받은 난 다시는 그곳을 찾지 않았다.




90년대 초 '성추행'이란 단어가 흔한 때가 아니었다. 특히 직장 내 여성의 지위는 그리 높지 않았고, 성추행을 당해도 말할 곳이 없었다. 오히려 '네가 어떻게 행동했길래 그런 짓을 당하냐? 여지를 줬겠지..' 등 피해자인 여성이 비난받기 일쑤. (남성도 성추행을 당한다지만, 아무래도 여성의 비율이 훨씬 높으니까)


불행히도 직장 내 성추행은 여전히 팽배하다. 하물며 많이 배우고 똑똑한 사람들이 모여있다는 국회에서도 이루어지고 있으니.. 대한민국에 희망이 있긴 한가? 누군가의 딸, 동생, 누나, 아내인 그들이 안전하게 직장을 다닐 수 있게 보호해 줄 장치가 마련되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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