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리모리 Feb 17. 2021

사람을 움직이는 힘, 희망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긍정적 기대감.

최근에는 포털사이트를 열거나 뉴스를 보면 온통 어두운 소식들 뿐이다. 그중 내 마음을 움직이는 가장 안타까운 소식이 있었다. 멀쩡히 다니던 직장을 잃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특히 직격탄을 맞은 여행산업은 이제 막 꿈에 부푼 사회초년생들을 죽음으로 몰아가기도 했다.

나 역시 작년 초 호주로의 워홀 막차행에 탑승하려 모든 계획을 세웠었다. 어학연수를 등록하고 비행기티켓을 구매하는 등 큰 지출이 있었으나 시국에 돈을 크게 날리고 좌절해야 했던 경험이 있기 때문에 현재 여행, 유학산업이 얼마나 힘들지 조금이나마 짐작이 된다.


코로나 블루. 누가 먼저 시작한 말인지 너무나 적절한 나머지 서글프다. 현재는 코로나 블루를 넘어서 블랙이라고까지 칭한다. 그만큼 사람들의 고통이 느껴진다.


 이 바이러스는 전 세계적인 것으로 모두가 함께 겪고 있는 고통이다. 물론 애초에 모든 사람의 상황이 평등하지 않기 때문에 겪는 고통의 크기가 같다고는 결코 할 수 없다. 심지어 현 상황은 직업군에 따라 겪는 타격이 크게 차이가 나고, 원래 힘들었던 사람은 더욱 힘들어질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내일을 맞이하기 위해 잠이 든다. 누군가는 다가올 내일이 두려워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기도 하고 말이다. 만약에 아주 비슷한 상황의 두 사람이 있다고 가정했을 때, 한 사람은 현재 상황에 대해 받아들이고 새로운 미래를 위해 준비하고 다른 한 사람은 현실을 부정하며 스스로에 대한 연민에 빠져 슬퍼하는데 힘을 쓰고 있다면 두 사람의 차이는 어디서 나오는 걸까.


코로나 때문에 신세를 비관한 사회초년생 A 씨가 스스로의 삶의 끈을 놓는 선택을 했다는 기사를 읽고 있을 때, 나는 퇴근하는 지하철 안이었다. 그 기사는 문득 주위를 둘러보게 만들었다. 이 지하철 안에도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이유로 몸을 싣고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같은 시간, 누군가는 끝없는 우울의 늪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말았다. 모두의 상황이 물론 다를 테지만 왜 이 젊은이는 이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을까. 이들은 무슨 생각으로 내일을 살아가려고 하는가.


멀리 갈 필요도 없이 나 스스로를 들여다보며 물었다. 내일 왜 침대에서 일어나니?

나는 비교적 운이 좋은 편이라고 생각한다. 혹시 모를 사태를 위해 워홀을 준비할 당시에도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일을 다니려고 계획했다. 그랬기 때문에 워홀행이 좌절되었을 때도 직장을 잃지 않았고 좌절했더라도 다음날 출근할 장소가 있었다. 나는 출근을 하면서 생각했다. '다행이다. 오늘은 어제보다 힘들지만, 아마 올해 말이면 상황은 나아질 거야.' 끊임없이 조금 더 나은 미래에 대해 생각했다.


미래라는 건 얼마나 불확실한 말인가. 사람들은 항상 앞 일은 내다보고 예측하려 애쓰지만 사실 그 누구도 당장 1분 후의 미래조차 쉽게 단언할 수 없다. '불확실함' 사람은 예측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불안감을 느낀다.


공포영화를 볼 때 우리가 공포를 느끼는 이유는, 감독이 특정 존재에 대해 앞으로의 행보를 예측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예측할 수 없는 무언가가 앞으로 나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 그리고 그 영향이 결코 긍정적이지만을 않을 것이라는 불안감에 우리는 공포를 느낀다.


불확실함은 공포인 것이다.


그렇다면 왜 내일을 살아가는가. 내일이 불안하지 않아서? 불안하지 않는다면 말한다면 코가 길어지고 말 것이다.

나는 내일을 살아가는 힘은 '희망'이라고 생각한다. 좀 더 나은 미래에 대한 긍정적 기대. 물론 그런 긍정적 기대에 대해 객관적인 이유가 있다면 더 좋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긍정적인 기대에 객관적인 이유를 만드려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저축하고, 주식을 사고, 결혼을 계획하고, 학교에 가기위해 공부하는 등의 노력이다. 그것이 이 지하철을 가득 채운 사람들의 이유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객관적인 이유가 없어지면 어떨까. 저축했던 돈을 날리고,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고, 하고싶었던 직업이 사라져 그동안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었을 때. 아마 인생에 대해 계획을 철저히 세우고 있는 사람일 수록 좌절이 더욱 클 것이라고 감히 생각한다.

오늘 당장 너무 힘들고 앞이 캄캄해서 보이지 않을 때, 내일 당장 일어나야 할 객관적인 이유가 보이지 않을 때. 나는 주관적인 이유를 만든다. 내가 오늘보다 내일 더 귀여울 테니까 일찍 일어나서 샤워해야지. 어제 읽었던 소설의 뒷이야기가 있으니까 출근해야지. 내일 살 로또가 이번 주 토요일에 당첨될 테니까 밖에 나가야지.


물론 객관적인 이유보다는 지속력은 조금 떨어진다. 하지만 당장은 내손에 아무것도 없더라도, 객관적인 이유가 아무것도 없더라도 조금 더 나은 미래를 기대해도 괜찮지 않을까. 희망을 가져봐도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미래는 아무도 모르니까.









작가의 이전글 유일한 선은 앎이요, 유일한 악은 무지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