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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백십 Jan 12. 2022

여자애 글씨가 뭐 어떻다고

2022년 새해 다이어리



저기, 이거 다시 …….


전날 친구가 빌려갔던 노트가 반나절도 안 되어 다시 돌아왔다. 깜짝 놀라 벌써 다 봤냐고 물었더니 대답을 흐리던 친구. 실은 글씨도 내용도 알아보기 어려워서 다른 친구 것을 빌리기로 했다며 미안해 어쩔 줄을 몰라했다.


미안하기는. 내가 봐도 중구난방의 노트 필기. 빌려달라고 할 때부터 오히려 걱정스러운 마음이 없잖아 있었는데 늦지 않게 다른 친구 걸 보기로 한 그 결정에 오히려 잘했다 싶었다.


그렇다.  악필 중에서도 악필. 와중에 글씨는  어찌나  . 게다가 왼쪽 위에서부터 차근차근 내려쓰지도 않는다. 기분에 따라 가운데 그림을 그려 넣기도 하고 가장 중요한 내용을 뜬금없이 한쪽 구석에  놓기도 한다. 그렇게 쓰다 보면 노트만 봐도 그때의 상황이 생생하게 되살아 나곤 했다.


그런 나에게 시중에 파는 대부분의 다이어리는 갑갑하고 답답하다. 손바닥 만한 속지. 몇 줄만 쓰다 보면 금세 여백이 사라지고 다음 장으로 넘겨야 했다.


게다가 반듯반듯한 선으로 나뉜 날짜 . 어제와 오늘이 같고 엊그제도 다르지 않다. 날마다 적을  일정한, 똑같은 하루를 반복하는 삶을 살지 않으면   거라고 시작도 전에 엄포를 놓는 듯했다. 미리 정해진  선을 벗어나 버리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래서인지 시중에 판매되는 규격화된 다이어리  때면 비좁은 케이지 안 몸을 한껏 웅크려 억지로 쑤셔 넣어야 하는 침팬지가  기분이 든다.


누군가 정해 놓은 선을 지키며 그저 그랬던 오늘과 세상에서 가장 행복했던 어제를 평균치로 나누어 매일 일정한 양의 일기를 의무감으로라도 적어야 할 것 같았다. 덩그러니 비어 있는 칸을 보면 또 어떻게든 채워 넣고 싶기도 하고. 그게 마치 내 삶에서 듬성듬성 구멍나 버린, 어떤 결핍같이 느껴졌던 것 같다.


그래서 신년 초에 여기저기서 받는 다이어리는 늘 처치 곤란한 예쁜 쓰레기이다. 가끔 하나 정도는 들고 다니면서 업무 미팅 용으로 쓰기도 했지만 그마저도 지금은 노트북이 대신한다. 중요한 일정은 탁상 캘린더와 핸드폰에 기록해 두고 일기는 메모장이나 SNS를 활용한다.


물론 금손들의 일명 “다꾸(다이어리 꾸미기)”를 구경하다 보면 때로는 나도 한 번쯤은 해 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늘 마음만으로 그친다. 남편이 몇 년 전부터 어디선가 얻어 오고 있는 큼지막한 빨간 가계부에 편지, 박물관 티켓, 기차표, 콘서트 팸플릿 따위를 풀로 붙이고 간단히 기록할 뿐이다.


다이어리도 얼굴도 꾸미는 데는 도통 소질이 없다. 근데 이런  사정도 모르고 대표로 글씨를 쓰거나 뭔가를 꾸며야  때면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자주 등이 떠밀리곤 하던 지난날.  글자 겨우 연습 삼아 썼을 뿐인데도 비웃음이 피식 새어 나왔다.



에이, 여자애 글씨가 왜 이모양이냐!



기분 나쁜 무례한 농담에 우아하게 화를 내는 , 그게 대체 가능하기는  걸까. 가뜩이나 별로였던 선배였기에  싫었나 보다. 글씨 이야기에 굳이 “여자까지 들고 나와야 했나 싶지만 이런 일들은 살면서 비일비재했다.


스무 살의 나는 웃고 넘겼지만 마흔 살의 나는 참지 않겠다. 누구든지 걸리기만 해라, 이제는 기꺼이 쌈닭으로 거듭 나리. 신년 다짐이 살벌하기도 하다.


@이백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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