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백십 Jun 21. 2021

워킹맘의 혼자 떠난 여름휴가

여름이야기

벌써 몇 번째 퇴짜인지 모르겠다. 이쯤 되면 나랑 싸우자는 건가? 바쁘고 정신없는 와중에 힘들게 구한 저렴이 비행기표인지라 웬만하면 맞춰주면 좋겠구만 이번에도 일정이 힘들겠단다.


아니, 그럼 대체 언제 갈 건데?!



직장에서 팀장한테 결제받는 것도 지치는데 집에서 남편한테까지 휴가 결제 컨펌을 부탁하며  읍소해야 하는 상황에 기분이 상했다. 심지어 대안도 사유도 없이 계속되는 반려! 그까짓 휴가 너 아니면 내가 못 갈 줄 아냐 쓸데없는 오기가 발동했다.


이 날은 이래서 싫고 저 날은 저래서 안 되고.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나 혼자 떠나겠다고 엄포를 두는데도 별 반응이 없다. 에라, 모르겠다. 홧김에 발권한 티켓. 남편, 너는 네가 알아서 해라, 나는 떠나련다.


유난히 지쳤던 여름이었다. 새로 바뀐 팀장이 오면서 전에 해왔던 업무 포맷을 모두 바꿔야 했던 연초, 아이의 초등 입학, 돌봄 교실, 학원 스케줄을 짜느라 진이 다 빠져버린 봄을 지내고 나니 한시라도 빨리 여름휴가를 떠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혼자 가겠다고 할 땐 그런가 보다 하더니 막상 떠나는 날이 되자 남편은 아침부터 가자미 눈이다. 뾰로통한 얼굴로 내가 뭘 하든 사사건건 트집을 잡는다. 그러려니 하면서도 얄밉다. 그러게 가자고 할 때 냉큼 오케이 했으면 좋았을 것을 왜 이제 와서 새삼 이러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마지못해 간신히 배웅하는 남편과 엄마와 잠시지만 헤어질 생각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아이를 뒤로 하고 집을 나섰다. 마음이 좋지 않았다. 무슨 영화를 누리겠다고 아이와 남편을 두고 홀로 떠난다고 했을까. 밀려드는 후회로 공항으로 가는 발걸음이 천근만근 무겁다.


라운지에 앉아 비행기를 기다리는데 뚝뚝 눈물이 난다. 오전부터 보이지 않는 기싸움에 지쳤는지 정말로 떠나고 싶은지도 잘 모르겠다. 무엇보다 아이가 자꾸 눈에 밟힌다. 그렇게 혼자 두고 오는 게 아니었는데. 순간의 충동적인 결정으로 여러 사람 힘들게 하는 나는 엄마 자격도 아내 자격도 여전히 부족하구나.



그렇게 축 처진 우중충한 기분으로 도착한 샤를 드골 공항. 오후 네 시의 따뜻한 햇살이 커다란 유리창으로 쏟아지고 있었다. 숨을 크게 들이쉬니 느껴지는 파리의 냄새. 기어이 여기에 왔구나!


4년 만에 다시 찾은 파리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더위가 한풀 꺾인 8월 말, 덜 붐비는 파리 시내는 오래된 건물 골목 거리를 그냥 걷기만 해도 좋았다. 오랫동안 못 보던 친구들도 만나고 그동안 못했던 혼자만의 시간도 가지다 보니 오길 잘했다 싶었다.  


혼자가 주는 여유와 자유, 이 얼마만이던가! 가만히 있어도 절로 나오던 콧노래. 이렇게 좋아도 되나 싶었다. 아이와 남편은 이미 까맣게 잊은 지 오래였다.



사흘은 프라하에서 묵기로 했다. 체코는 처음이었고 밤늦은 시간에 도착하는 거라 긴장했는데 친절한 프라하 사람들 덕분에 다행히 무사히 도착했다.


욕심내어 프라하 성과 드레스덴 패키지를 연이틀 신청했다. 갑자기 추워진 비 오는 날씨에 프라하 성 둘러보다 포기할 뻔도 했지만 그때 같이 듣던 사람들과 친해져 서로 사진도 찍어주고 저녁도 함께 했다. 생각보다 혼자 여행 오는 나 같은 사람들이 많았다. 낯선 사람들 덕분에 뜻밖의 즐거움이 있었던 프라하였다.


밤에도 전혀 무섭지 않았다. 구시가지를 걷다 보면 여지없이 어디선가 들려오는 한국말. 혼자 걸어도 든든했다. 덕분에 프라하의 야경도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봐도 봐도 좋은 까를교 강 건너 프라하 성을 뒤로하고 공항으로 향했다. 짧은 일정인 만큼 아쉬웠던 프라하. 다음번엔 꼭 가족과 함께 오리라 다짐도 했다.


올 때는 깃털처럼 가벼웠던 캐리어가 갈 때는 터져나갈 것만 같았다. 여행 시작 전 들었던 미움과 죄책, 자책감은 어느새 사라지고 그저 빨리 남편과 아이가 보고 싶었다.


집에 도착하니 남편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다 보다. 아니 그보단 선물에 기분이 좋아졌던 걸까. 셋이 부둥켜 얼싸안고 있다가 선물 사 왔다는 말에 바로 캐리어부터 풀어헤친다.


그렇게 팔 일간의 나 홀로 여름휴가는 끝이 났다.


남편에게는 혼자 떠나서 외로웠다, 쓸쓸했다, 그리웠다고 했지만 실은 아무것도 안 해도 그냥 뭐든 다 좋았다. 누구에게 맞춰야 하거나 누구를 챙겨야 하는 일 없이  오롯이 내가 하고 싶은 일에만 집중할 수 있는 자유에 감사했다. 휴가가 끝나고 난 뒤 돌아가야 할 일상이 있었기에 그 자유와 해방을 더욱 즐길 수 있었다.


그게 무엇이든 가족이니까 반드시 같이 해야 한다는 프레임은 숨이 막힌다. 어차피 평생 함께 할 가족, 가끔은 혼자가 되는 시간도 필요하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직장에서도 집에 와서도 눈에 들어오는 일거리 때문에 어디서도 쉬기 힘들다면 눈 딱 감고 단 사흘만이라도 나 홀로 여름휴가 떠나보는 건 어떨까? 뒷일 걱정은 마시라, 나 없어도 다 잘만 돌아가는 세상이다. @이백십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