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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백십 Jul 05. 2021

해마다 찾아오는 여름 손님, 바선생

여름이야기



엄마, 엄마! 빨리  와봐.



주방에 있는 나를 다급하게 부르는 아이 목소리. 흐르는 물소리와 주방 환기구 돌아가는 소리 때문에 처음 몇 번을 제대로 듣지 못했나 보다. 급기야는 울먹이는 것 같았다.


놀라서 방으로 달려가 보니 아이가 책상 위에 올라서서 벌벌 떨고 있는 게 아닌가! 아이 손가락이 향한 곳에서 무언가가 얼핏 보였다가 책장 밑으로 금세 사라졌다.


느낌이 왔다.  것이 왔구나.


잠잠하다가도 꼭 여름만 되면 한 마리씩 나타나 그 존재감을 우리에게 확인시켜주시는 그분. 보통은 주방에서 보였는데 이번엔 생각지도 못하게 아이 방에서 나타나다니!


방바닥에 엎드렸다. 책장 밑에 두었던 테니스 채들을 조심스럽게 치웠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직 멀리는  갔다. 책장 밑을 배회하고 있는 그의 움직임을 포착한 순간, 마치 적을 포착한 군인처럼 사력을 다해 바이오킬을 뿌려댔다.


진드기용 바이오킬이었지만 먹혀들었다. 그의 발걸음이 점차 느려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기어이 종이 한 장이나 들어갈까 싶은 옆 책장 틈으로 큰 몸뚱이를 비집고 들어가는 녀석. 과연 몇 억년의 끈질긴 생명력을 이어 온 족속 다웠다.


놓쳤구나 싶어 어째야 하나 고민하면서 주방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곧 다시 들리는 아이의 외침. 외면하고 싶은 마음 애써 누르며 심호흡 크게 하고 아이 방으로 향했다.


방바닥 한가운데에서 천정을 향해 아우성 대고 있는 그분을 보자 조금은 안심했다. 그러나 언제 다시 몸을 뒤집어    갈지 모르기에 침착하게 책부터 찾았다. 가급적  번에 안전하게 끝낼  있는 두꺼운 책으로.


아이가 가져온 책이 아까웠지만 그런  따질 여유가 없었다. 단단히 마음먹고 강하게 내리쳤다. 끝난  알았는데 어디서 나왔는지  마리가  있다. 다행히 그분도 뒤집힌 상태. 역시나  다른 책으로 해결했다.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도저히 책을 들어 그 사체를 확인할 용기가 없었다. 한 마리도 아니고 두 마리나 나올 정도면 이 방안엔 얼마나 많은 그분들이 계시다는 건지. 그 안에 1초도 있기 싫었다. 엉망이 된 방을 그대로 내버려 둔 채 문을 닫아 버렸다.


그때 집안을 가득 울리는 벨 소리. 헬퍼다! 드디어 헬퍼가 왔다. 천군만마를 만난 듯한 기분. 조심스럽게 그에게 물었다.


혹시 바퀴벌레 무서워해?



그러자 웃으며 대답하는 . 전혀 무섭지 않단다. 신기하게 필리핀 사람들은 바선생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부끄럽고 창피했지만 얼굴에 철판 깔고 부탁했다.  안에 이러저러하게 일을 벌여 놓았으니 미안하지만 치워   있겠냐고. 흔쾌히 알겠다고 대답하는 그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덥고 습한 홍콩의 여름


언제부턴가 자꾸 외면하고 싶다. 불편하거나 꺼림칙한 일을 정면으로 마주하기보다 마음속 한쪽 구석에 덮어놓고만 싶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없어지는  아님을 알면서도 일단 고개부터 돌리고 본다.


특히 사람과의 관계에서 그렇다. 삼십 대 중반 즈음부터였을까? 볼펜 똥을 한 번도 닦지 않고 쓰는 것 같은 찝찝한 기분으로 이어져 오는 관계가 하나둘씩 생겨났다.

 

누군가에게 생긴 서운한 감정을 돌보지 않고 내버려 두는 편이다.  그때 섭섭했다고,   그랬냐고 용기 내어 바로 물었으면 아무 일도 아닌 듯이 넘어갈 수도 있었을 텐데 혼자서 섣부르게 짐작하고 판단하곤 한다. 부정적인 감정은 쌓이고 쌓여 어느새  사람과  사이의 높다란 벽으로 자라난다. 도저히 넘을  없는 커다란 벽으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멀어진다. 돌이켜보면 어느 누구 하나 크게 잘못한 것도 아닌  같은데 제때 치워지지 못한 오해는 건널  없는 강물처럼 불어나 있다.


어릴 적 친한 친구에겐 부모님에게도 말 못 할 비밀을 털어놓곤 했는데…. 이제는 안다. 그 비밀들이 종래에는 되려 날 공격하는 무기로 쓰여 남들의 입방아에 얼마나 오르내릴지.


그렇게 혼자가 점점 더 편해져 간다. 애매하게 꼬인 관계의 실타래 풀겠다고 단둘이 만나서 각 잡고 진지하게 대화를 이어나갈 생각만으로도 어색함에 숨이 막힌다. 마음속 응어리를 청소하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 둠을 택한다.


1,2년 지난 줄 알았다. 우리가 말하지 않고 지낸 지. 그런데 벌써 십 년이나 흘렀단다. 시간은 마음보다 빠르게 흐른다. 강산도 변한다는 그 오랜 시간, 내 마음은 한 발자국도 떼지 못하고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앞으로의  년도 이렇게 그냥 가버리면 어쩌지. 그래도 먼저 나서서  용기는 아직 없다. 하루에  번씩 방바닥은 닦으면서도  마음 청소는 여전히 게으른 나다. @이백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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