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의 영상화 단편영화 시리즈 3. 영상 제작기
Intro. 작품 소개
달아나다 평택호에 발이 빠진 저녁 해는
낮 동안 붉게 타오를 때보다
더욱 뜨겁게 이글거리고 있었습니다
그 누가 노을을 꺼져가는 촛불의 마지막 발악이라 하였는가? 지는 해만큼 붉고 뜨겁게 타오르는 것은 없다. 타오름과 사랑. 노년에도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은 시 <황혼>의 주제였다. 누구든,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는 모두 뜨겁게 사랑한다. 프로젝트의 마지막 시로 너무나 적합했으며, 이 시 또한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지막 단편영화 <황혼>은 결혼한 지 30년이 다 되어가는 부부의 모습을 그린 영화이다. 비록 배우자의 존재가 한없이 익숙해질 수도 있지만, 젊은 시절을 회상하며 그 때 그 시절만큼이나 뜨겁게 사랑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함께 산 지요…? 30년 좀 안 됐나?”
- 단편영화 <황혼> 中 수희의 대사 일부 -
Character. 인물 소개
너무 오래 같이 살았다. 너무 오래. 결혼한 지 30년이 다 되어가기에 데이트를 하는 것도, 맛집을 가는 것도 주책스러운 것 같다. 남편의 제안에도 심드렁하고 그를 대하는 태도는 무뚝뚝하다. 그러나 그를 사랑하는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이 젊은 시절만큼 뜨겁지 않을 뿐,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 영화 후반부에 다시 뜨겁게 타오르는 사랑을 제시할 수 있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난 이것도 하고싶고, 저것도 하고싶은데! 성철은 아내와 같이 하고싶은 것들이 많다. 아내가 좋아하는 닭강정을 즉흥적으로 먹으러 가고 싶기도 하고, 아들래미 집에 내려갈 때도 옷을 맞춰입고 싶다. 그럴 때마다 아내는 심드렁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특유의 밝은 성격과 능청스러움으로 아내에게 다가간다.
촬영 준비를 하며
<황혼>은 시리즈의 마지막이기에 온전히 여기에만 집중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지만 큰 오산이었다. 시놉시스를 짜고 시나리오를 디벨롭하면서도 다른 작품들의 본 촬영을 해내야 했기에, 준비 과정이 마냥 순탄치는 못했다. 다른 촬영들을 거치면서 말 그대로 <황혼>은 어느정도 기획단계에서 ‘늘어져’버렸다. 시나리오 틀은 이미 한 달 전에 잡아뒀지만, 다른 일정들을 소화하고 다시 돌아오니 그 때 정했던 것들이 잘 기억나지 않기도 했고 현 상황에 맞지 않는 것들도 많았다. 이래서 일은 컴팩트하게 처리해야 하나보다. 우선 로케이션 헌팅부터 정말 골치였다.
프로젝트 팀원 세 명 모두 일반 가정집에 살고있지 않았기에 영상의 주 배경이 되는 가정집을 헌팅하는 것부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산의 범위를 초과하지 않으면서 촬영을 진행할 수 있는 곳을 에어비엔비에서 찾아 촬영시간인 반나절만큼만 대여를 부탁드렸고, 이 특수한 예약에 관련하여 연락을 계속 주고받아야 했다. 촬영을 순조롭게 마칠 수 있게 많은 배려를 해주신 에어비엔비 호스트분께 감사하는 마음을 드린다.
또 <황혼>의 엔딩 씬의 로케이션 또한 고민이었다. 노을은 시 <황혼>의 주요 시상이기에 영화에도 꼭 녹여내고 싶었다. 물이 있으면서 노을이 잘 보이는 곳은 한강만한 곳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람들이 많이 없이 조용하면서도 노을을 잘 볼 수 있는 곳이 마땅치 않아 특별히 신경써서 로케이션을 선정해야 했다. 운명적으로, 한강을 떠나기 바로 직전 좋은 장소를 찾았고 본 촬영날에도 성공적으로 카메라에 담아낼 수 있었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로케 이후 여러 상황들(사실 99%는 코로나때문이겠지만)이 겹쳐 제대로 된 사전촬영을 진행하지 못했다. 특히 집에서 찍는 컷들의 경우 이미 해당 가정집에 일정이 꽉 잡혀 있어, 촬영 당일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방문할 수 있었다. 이런 경우는 거의 처음이었으나 그렇다고 촬영을 하지 않을 순 없었다. 최대한 촬영 당일에 헤매지 않기 위해 스토리보드를 꼼꼼히 그렸으며 집의 방과 가구의 유무나 위치 등을 자세히 잡아 놓기 위해 거의 매일 집주인분과 얘기를 나누었다.
촬영은 회상 장면의 한 씬을 제외한 나머지를 모두 하루만에 찍었고, 젊은 시절의 성철과 수희가 나오는 회상 씬은 후에 추가적으로 촬영하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렇기에 첫 촬영날엔 많은 곳을 하루만에 돌아다니며, 노을이 지기 전에 한강 씬을 모두 찍어야 하는 빡빡한 일정을 소화해내야 했다. 특히 데이트 몽타주씬의 경우 다양한 로케이션의 컷들이 짧게 짧게 지나가는 구성이었기에, 그 모든 몽타주컷들을 다 찍을 수 있을지 끝까지 고민이었다.
시간이 너무나 부족했기 때문에 촬영 전날까지 계획표를 짜면서도 공들여 만든 몇 컷들을 빼거나, 심지어 한 씬은 통째로 들어내야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당일의 교통상황, 날씨, 소음 등의 변수에 따라 촬영 시간이 많이 차이가 날 것 같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 결과 눈물을 머금고 우리가 생각한 모든 것을 찍을 수 있다는 촬영계획표 ‘희망편’과 최악의 경우, 덜 중요한 장면들은 날리는 계획인 ‘절망편’을 나누어 만들었다. 그 날 밤엔 ‘꼭 희망편대로 찍을 수 있게 해주세요’ 기도하며 잠에 들었던 것 같다.
촬영을 하며
다행히 촬영은 ‘희망편’대로 흘러갔다. 그럴 수 있었던 큰 이유 중 하나는 두 배우님의 노련함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성철 역의 양창완 배우님께선 연출진인 시니어 프로젝트는 물론이고 상대 배우님에게도 친화력을 잘 발휘하셨다. 그 덕분에 둘의 연기호흡이 특별한 디렉팅을 거치지 않았음에도 잘 맞았다고 생각한다. 촬영 전에는 긴장도 풀어주시면서 분위기를 살려주셨다면, 슛이 들어갔을 땐 ‘어떻게 연기해야 하는가’에 대한 본인의 기준을 바탕으로 좋은 연기를 보여주었던 멋진 배우이셨던 것 같다.
수희 역의 정혜영 배우님께선 목소리가 아주 좋으셨다. 특히 영상 마지막에 나오는 시구를 읽는 나레이션을 녹음할 때 자신감을 내비쳐 주셨던 기억이 난다. 라디오에서나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낭송을 해주셨는데, 과연 영상 말미의 노을과 아주 잘 어우러지는 시구 낭송이었다. 극 중 무뚝뚝한 수희와는 달리 정말 친절하셨고, 조심스러운 면도 가지고 계셨다. 그러한 내면의 세심함이 연기에도 잘 드러나, 동작과 표정 하나하나에도 디테일이 묻어났기에 작품의 완성도를 더 끌어올릴 수 있었던 것 같다.
본교의 캠퍼스는 영상촬영 로케의 계륵과도 같은 존재이다. 분명 따로따로 떼서 보면 정말 예쁘고 카메라에도 잘 담길 것 같으나, 막상 구도를 잡고 색감을 보다 보면 뭔가 만족스럽지 못하다. 회상을 찍기로 한 추가촬영날에도 이 부분이 제일 걱정되었다. 어디서 어떻게 찍을지 미리 다 정해놓긴 했지만, 왠지 모르게 매일 색감이 바뀌는 본교에서 좋은 촬영을 하기 위해 더 꼼꼼하게 확인했던 것 같다. 결과적으로 만족스럽게 촬영본이 나왔고 정말 ‘사랑스러운’ 씬이 탄생한 것 같다.
젊은 성철 역의 김완택 배우님, 젊은 수희 역의 박진주 배우님 모두 몇 컷이 안 되는 짧은 촬영임에도 불구하고 대본 숙지를 잘 해오셔서 촬영이 수월했던 것 같다. 3초짜리 컷을 위해 작은 부분들까지 세심하게 바꿔가며 연기해주신 박진주 배우님, 연기도 잘 하셨고 여러 디렉팅 주문들도 바로바로 캐치해주셨던 김완택 배우님 두 분 모두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달하고 싶다.
이제 <황혼>을 마지막으로 시니어 프로젝트의 첫 연작시리즈가 끝나가는 것이 보인다. 시리즈의 마지막을 ‘사랑’으로 장식할 수 있어 기쁘다. 프로젝트의 기획과 촬영, 그리고 편집을 하며 만났던 모든 것들을 사랑한다. 곧 올라올 단편영화 <황혼>을 보는 여러분들도 많은 사랑을 할 수 있는 연말을 보낼 수 있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