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갑수 <당분간은 나를 위해서만>
너는 알고 있어.
이번 여행이 네가 기대했던 것보다 낭만적이지 않으리란 사실을.
여행은 스릴 넘치지도 않고 예상외로 지루할지도 몰라.
어쩌면 네가 길에 발을 내딛는 그 순간, 집으로 돌아가 침대 위에 몸을 누인 채 드라마를 보던지 로맨스 소설이 읽고 싶어 질지도 모르겠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넌 오랫동안 떠나기를 갈망해 왔잖아.
여정을 계획하고 설레어했잖아.
여행을 떠날 거라고 네가 전화했을 때,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네 목소리는 반 옥타브가 높더군.
네 몸은 마치 지사에서 10센티미터 정도 떠 있는 것만 같았어.
넌 새 신발과 필기감이 좋은 노트와 손에 꼭 맞는 펜을 샀다고 자랑했지.
그리고 이 지긋지긋하고 남루한 일상에서 비로소 벗어날 수 있다며 안도했어.
그래, 네 말이 맞아.
인생에서 여행보다 더 큰 해방감과 자유를 느끼게 해주는 것은 없어.
어쩌면 외롭고, 지루하고, 슬프고, 무기력할 때 우리가 달려가야 할 곳은 차가운 바다이거나 끝없이 흘러가는 강물 곁인지도 모르지.
우리를 정말로 위로해 주는 것은 덜컹거리는 기차 칸의 시큼한 시트 냄새이거나, ‘빈 방 있음. TV 욕실 완비. 깨끗함’이라고 적힌 모텔의 허름한 방일 지도 몰라.
오늘 아침 베란다에 내놓은 선인장 화분이 말라 있는 걸 보았어. 선인장 속에 들어 있는 물방울들이 모두 빠져나와 버린 거야. 영혼이 증발한 거지.
그동안 너무 무심했다는 생각을 했어.
화분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너무 오랫동안 물을 주지 않았어.
하루하루를 겨우겨우 연명해 왔던 것 같아.
언젠가 네가 말했지.
“매일 똑같은 증명사진을 찍으며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아. 웃는 법을 잊어버렸어. 머릿속은 텅 비었어. 고개를 흔들면 빈 깡통 소리가 나. 무언가 채워 넣어야 하는데 그게 뭔지를 모르겠어.”
드디어 결심했군. 잘한 일이야. 네가 부러워.
하루가 됐건 일주일이 됐건, 아니면 한 달이 됐건 어쨌든 떠난다니 축하할 일이야. 중요한 건 어딘가를 향해 떠난다는 사실이거든.
부디 멋진 여행이 되기를 바랄게.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번 여행은 낭만적이지도 않고 지루할지도 몰라. 위험할 수도 있겠지. 어두운 밤, 낯선 곳을 헤매게 될 수도 있어. 누군가 네 가방을 들고 사라져 버릴지도 몰라.
“그래도 여행을 떠날 수 없다면, 우리는 마른 수건처럼 따분한 일상을 어떻게 견뎌야 했을까. 생각만 해도 끔찍해. 내일부터 내가 있을 곳은 여기가 아니야. 그건 정말 다행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