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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ctober Oct 14. 2020

당신 없이 떠난 세부에서

내 그리움의 표상에게

세부 블루워터 마리바고 비치 리조트 풍경


예약했던 호핑투어가 떠나는 당일 취소되어서 여행 시작도 전부터 계획에 차질이 생겼어. 비행기에서 얕은 잠을 자고, 현지 시각 오전 7시부터 여행이 시작됐지. 영화 기생충이 문득 생각나더라. “계획이 없는 게 계획이란다.” 계획하지 말걸...




오늘 처음 마주하게 된 세부는 생각과 달랐어. 빈익빈 부익부를 느낄 줄 알았지만 실제로 본 그 광경이... 너무나도 충격적이었던 건 말도 못 하는 갓난아기와 그 아가를 길바닥에서 재우고 있는 여 일곱 살짜리 소년, 소년 옆에서 곤히 자는 부부와 첫째 아들로 보이는 아이의 모습이었어. 이 가족뿐만 아니라 갓난아기를 안고 도와달라 말하는 어머니들, 학교에 가야 할 시간에 거리에서 수건을 팔던 소녀, 소년 등등. 우리나라에도 노숙자가 있지만, 여행지에서 보니 기분이 유독 묘했던 것 같기도 해. 돕기 위해 당장 내 주머니에 있는 돈을 그들에게 쥐여준다면 오늘 식사는 해결할지 모르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오늘의 모습을 지속시키는 방법이자 무책임한 행동밖에 되지 않을 듯해서, 불편한 마음을 지니고 그렇게 여행하게 되었어.




여행이라고 반드시 아름다운 풍경과 좋은 것만 보는 게 아니라는 걸 이미 지난 여행을 통해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그런데도 이런 광경은 먹먹하고도 막막했어. 한편으로는 부모님께 감사하기도 하고, 투정뿐인 내 삶을 어떤 누군가는 갈망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길거리에서 생활하는 저들이 나보다 불행할 거라는 생각이 어쩌면 잘못된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이렇게 많은 생각이 드는 그런 첫날이고 여행이야.




세부는 여행의 도시답게 여행객을 겨냥한 쇼핑센터가 매우 많아. 오늘은 세부에 철인 3종 경기가 있는 아이언맨 데이라 그랩이 잘 안 잡혀. 딱히 큰 계획이 없어서 느지막이 일어나 3일째 같은 카페, 같은 자리에 앉아 모닝커피를 마시고, 길을 걷다 우연히 본 동네 도서관에 갔다가 쇼핑센터에 왔어. 이곳에서 열린 초등학생의 패션쇼를 보고, 알라딘 같은 곳에서 중고 책을 샀지. 이런 여유를 즐기고 있자니 문득 필리핀이나 베트남에서 한 달 살기를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




떠나와서 매일 한 게 있다면 맥주 마시기, 펜으로 끄적거리기, 사진찍기, 폭식하기, 수면장애 따위는 없었던 사람처럼 푹 자기, 일몰 보기, 앞서 말한 같은 카페 같은 자리에 앉아 모닝커피 마시기, 당신에게 편지쓰기였어. 짧은 듯 긴 여행 동안 남아있던 이별의 감정이 불쑥 찾아오기도 하고, 나의 수많은 역할 지위에 대한 불안과 공포가 찾아오기도 했지만 그런데도 행복이 너무 컸어. (사실 요즈음 행복했던 날이 별로 없었어 나름 암흑기였거든) 아마 나는 이번 여행을 회상하며, 새로운 티켓을 끊고 떠날 날만을 고대하겠지.




있지, 이건 나의 여행 기록이자, 당신을 향한 사랑 고백이야. 흔하디흔한, 이미 질리도록 말한 사랑한다는 말 대신 말이야. 여행의 어떤 순간에도 빠짐없이 당신과 함께했어. 당신이 한순간도 빠짐없이 그리웠어. 있지, 나는 항상 당신이 그리워. 그래서 이제는 그리움이 사랑 같아.


세부 산토니뇨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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