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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백 Sep 30. 2022

감나무집 평리댁

                      



고향 텃밭에 감나무가 빼곡했다. 내가 태어나기 한 해 전에 심었다는 나무들은 학교에 들어갈 무렵에는 튼실하게 자라 숲을 이루었다. 어렸을 적 그곳에서 친구들과 숨바꼭질도 하고, 감꽃을 주워 목걸이를 만들며 놀았다. 익지 않은 떫은 감에 된장을 발라 누가 더 잘 먹나 시합을 하다 배앓이를 하기도 했다. 가을이 되면 감잎이 지고 대롱대롱 매달린 열매가 노을을 삼킨 것처럼 붉어갔다.


이제 감나무 집이란 이름이 무색하게 나무들은 잘려나가고, 오래된 장두감나무와 새로 심은 단감나무 두 그루만이 남아있다. 감꽃이 진 잎은 땅 기운을 받아 초록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형제들은 아침 일찍 고향을 향해 출발했다. 여럿이 몰려가 수선 피울 것 없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흔적도 없이 떠나오는 것이 더 서글플 거라며 함께 고향을 찾았다. 어머니는 자식들을 반겼다. 


우리는 잔치 분위기를 내며 음식을 놓고 둘러앉아 떠들어댔다. 어느 누구도 오늘이 고향에서의 마지막 밤이라는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휠체어에 실린 어머니가 바람을 쐬러 간 사이 장롱을 열어 짐을 쌌다. 어머니가 기거할 곳에서는 아무것도 가져오지 말라 했지만, 그래도 빈손으로 가는 것이 서운해 이것저것 넣다보니 가방이 가득 찼다. 우리들은 밤새 어머니 곁에 둘러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거기 가면 이곳에서보다 외롭지 않을 거예요. 아프면 바로 치료받을 수 있지, 전   문 간병인이 있으니 몸 쓰기도 수월할 거라구요. 간장, 된장도 직접 담궈 먹는다니   음식도 괜찮을 거고, 무엇보다 저희들이 가까이 있으니 수시로 보실 수 있어요.”

  그러니 고향 떠나는 걸 서러워마라 했다. 어머니는 당신 마음은 접어두고 걱정 말라고만 했다. 


시집오던 해부터 어머니는 이집에서 살았다. 이것저것 사업에 손을 댔던 아버지는 하는 일마다 실패해 집안 살림은 늘 어려웠다. 농사꾼이 된 아버지는 책을 끼고 살았다. 어머니가 시집올 때 해왔다는 앉은뱅이 재봉틀은 우리 집 생계수단이 되었다. 음식 솜씨도 빼어나 마을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상차림을 도맡아 했다. 온 마을 사람들이 잔치 집 기름 냄새에 몰려들어 끼니를 해결해도 우리들은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어머니는 늘 빈손이었다. 


집에는 마실꾼들이 밤낮없이 모여들었다. 방마다 사람들이 들어차 나는 그 틈바구니에서 잠이 들곤 했다. 형제들이 도시로 떠나고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사람들의 왕래는 잦아들었다. 아버지 장례를 치르고 우리는 어머니를 두고 떠나왔다. 내 발로 걸을 수 있을 때까지 떠나지 않겠다던 어머니는 해가 갈수록 쇠약해졌다. 급기야는 다리를 못 쓰는 지경에 이르렀다.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는 어머니를 두고 올 때마다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머리를 맞대고 생각해낸 것이 요양원이었다. 어머니는 주렁주렁 매달린 장두감나무처럼 자식들을 품에 안았던 곳을 벗어나고 싶지 않았던 것일까. 요양원 이야기를 비치면 차라리 혼자 있는 게 낫다며 들으려 하지 않았다. 대책 없이 고민만 늘어 갔다. 결국 막내인 내가 설득에 나섰다. 어머니는 자식들을 위해 마지못해 마음을 돌렸다. 


당신이 텃밭 감나무처럼 잘려 나가리라 짐작이나 했을까. 어머니는 그날 밤 평소대로 자리에 들었다. 노모의 결정에 부담이 줄어든 자식도 있고, 서글픈 자식도 있겠지만 다들 잠든 척 눈을 감았다. 어머니 심중을 헤아리니 뜨거운 것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다. 나는 감나무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마당가를 서성였다. 봉당에 앉아 있던 백구가 바람에 흔들리는 검은 그림자를 보고 컹컹 짖어댔다. 감나무 잎은 저리도 푸른데 이 밤이 지나면 이별이다. 이제 평리댁 빈집 안부는 누가 전해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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