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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정원 Dec 24. 2020

지름은 지름길이다

Ep. 2: 24,059자 (-55, 841자)

‘지름은 지름길이다’

친구현자의 조언이다. 원하는 목표로 질러 가려면 먼저 필요 장비들을 최대한 빨리 질러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본격적으로 집필을 시작하기 전에 맥북 받침대와 매직 키보드 2, 매직 마우스를 구해 놓았다. 매직 마우스를 사용하려니 마우스패드가 필요한데, 아무리 인터넷을 뒤져도 꼭 맘에 드는 상품이 없길래 할 수 없이 주문제작했다. 원하는 이미지를 찾기까지 꽤 긴 시간이 걸렸다. 업무효율성을 최대화하기 위해 구글에서도 쓴다는 타임 타이머를 직구했다. 코로나 때문에 미국내 배송이 늦어져서 기다리는 시간 동안 불가피하게 효율성이 좀 떨어졌다. 막상 타이머가 도착하고 보니 드라이버가 있어야 배터리를 넣을 수 있네. 아놔;; 맞는 사이즈의 드라이버를  구매할 때까지 조금 더 비효율적으로 살았다. 읽고 있는 종이책의 주요 부분들을 표시할 포스트잇과 필기류도 추가 구매했다. 집필하면서 오래 따듯하게 커피를 마시려면 아무래도 대용량 텀블러도 필요한 것 같아서 검색을 시도하다 잠정 중단했다. 텀블러가 이렇게 어려운 아이템인지 미처 몰랐다. 용량부터 소재, 뚜껑, 입 닿는 부분, 컵을 책상에 내려 놓을 때 탁 소리가 나지 않도록 바닥에 완충제… 생각할 점이 한 두가지가 아니다. 지름길이 너무 험하다. 지름이 지름길 확실하니, 친구야? 너무 많은 시간과 돈이 드는구나. 그래도 덕분에 작업실이 점점 작업실처럼 보인다. 작업실에 들어서면 뭔가 쓰고 싶고 써야 할 것 같은 분위기가 조성되어 가고 있다.


집필에 사용할 프로그램은 두 개로 나눴다. ‘쓸 것’에 대한 아이디어 정리는 롬 리서치 roam research를 사용한다. 머리에 떠오르는 단상, 그 단상을 의미있는 주제로 확장하는데 필요한 자료 리스트, 다루고 싶은 에피소드, 추구하고 싶은 스타일 아니, 이것만은 꼭 피하고 싶다는 것들까지 여러 카테고리로 나누어 닥치는 대로  기록하고, 정리하고, 연결하고 있다. 계속하다 보면 뭐라도 나올 것이다.


원고는 Pages를 쓴다: 실제 책을 써가는 문서 하나, 집필 과정을 기록하는 문서 하나, 집필을 돕기 위해 읽는 책들을 정리하는 독후감 문서 하나.

글의 계층 구조가 확실하게 보이도록 문서의 스타일 양식도 새로 정리했다. 반복되는 작은 일들에 에너지와 시간을 뺏기면 안 되기 때문이다. 일상의 사소한 일들이 결정적인 순간에 기운을 빠지게 한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샤워 후 바로바로 치우지 않으면 결국 배수구를 막는 머리카락처럼 말이다. 단축키들도 하나, 둘 외어 가고 있다. 이런 기본적인 세팅을 하다보면, 나는 도대체 여태 뭘 하고 산 거임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피너츠> 즉, 스누피를 만들어 낸 만화가 찰스 슐츠의 말을 아전인수하고 있다. 슐츠는 일간 신문과 일요판 신문, 일주일에 여섯 번 스누피를 실었다. 그 말은 일주일에 여섯 번 마감을 막아내야 했다는 것이다. 이 짓을 그는 1950년부터 2000년 2월 13일, 사망 다음날까지(!) 50년 동안 계속 했다. 이게 어떻게 가능했는지 모르겠다. (여기서 '이게'는 '50년'을 가리킬 수도 있고 '사망 다음날' 일 수도 있다.)

그의 작업 방식은 다음과 같았다. 매일 아침 9시 반이면 자택 내 작업실로 출근한다 (골프 홀이 있는 잔디밭과 수영장을 거쳐 1킬로 정도 걸어서). 연습장에다 낙서를 하며 소재를 찾다가 머릿속으로 아이디어가 어느 정도 진전되면 이미 네 칸이 인쇄되어 있는 28인치 판지를 가져와 대사를 적고, 인물과 배경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가 1999년에 한 말 중 일부를 앞뒤 문맥 다 잘라먹고 인용하자면 작업은 “그 칸들을 다 채워 넣기만 하면 되는 일이죠.” (스누피의 글쓰기 완전 정복, p. 37) 어머, 간단하잖아? 


나는 지금 네 칸씩 인쇄되어 있는 28인치 판지들을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다. 간간히 연습장에 낙서도 하면서 말이다. 이제  칸들을 채워 넣기만 하면 된다. 무엇보다도 나는 문 하나만 열면 작업실이니 슐츠처럼 1km를 걸으며 수영장과 잔디밭을 지나치는데 시간을 소요하지 않아도 된다. 그보다 훨씬 유리하다고 할 수 있다.

구성과 목차를 8일후 출판사님께 넘겨야 한다. 메리 크리스마스!




추신: 어제 읽은 <글쓰기 생각쓰기>에서 작가 E. B. 화이트의 작업실을 묘사한 문장이다.


"그들을 사로잡은 것은 간소함이었다. 화이트는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다. 글쓰기 도구, 종이 한 장,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나오지 않은 문장을 받아 줄 휴지통 하나."  


텀블러는 사지 않겠어요.  




커버 이미지: Photo by Isaac Smith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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