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저런 후회
삐삐는 소리에 무척 민감한 편이었다.
특히 휴대폰 카카오 톡이나 문자 소리를 싫어해서
전화기에서 소리가 나면
당장 일어나서 자리를 떠나 다른 곳으로 피했다.
처음에는 그 모습이 우스워서 장난 삼아 소리를
내보고, 그 소리 때문인지 아닌지 시험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확실히 신경질적인 반응이었고 기껏 앉거나 누워 있다가도 소리가 나면 벌떡 일어나 움직이니
삐삐가 힘들 것 같아 여러 가지 방법을 써보았다.
카톡 소리를 바꿔 보기도 하고
소리 날 때마다 간식을 주면서 나쁜 일이 아니라는 인식을 심어주려고 애썼지만 허사였다.
할 수 없이 전화기 소리를 줄이거나 진동으로 해야 했는데
간혹 전화 소리를 못 듣는 바람에 남편의 화를 돋우었다.
특히 남편이 출장을 가 있을 때는 소리를 못 들을까 봐 전화기를 손에 잡고 살았다.
전화를 확인할 때는 삐삐 눈치를 보며 슬그머니 화장실에 숨어서 보기도 했는데
카톡 소리나 문자 소리가 나면 나 역시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질 만큼 예민해졌다.
삐삐는 복도에서 나는 소리에 귀 기울여 걸핏하면 짖어서 나에게 야단도 많이 맞았다.
느닷없이 짖어대는 소리에 놀라서 자빠질 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나중에는 방음벽을 설치하고 중간 문도 만들었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인터폰 소리도 꺼 놓고 지냈다.
삐삐가 전화기 소리를 싫어하니 사진 찍는 것 역시 싫어했다.
찰칵 소리가 싫기도 하고 전화기를 들이대니까 가만히 있다가도 움직여서
예쁜 순간을 사진 속에 잡기가 어려웠다.
나 혼자 보기 아까운 모습을 놓치지 않으려고 억지로 붙잡아 앉히면 머리를 돌리기 일쑤였다.
그래도 좀 더 많은 삐삐와의 사진을 남겨 둘 걸 하고 요즘 많이 후회를 한다.
산책을 나가면 남편은 나와 삐삐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길 원했다.
삐삐는 언제나 예쁜 모습이었지만
아무렇게나 하고 나온 내 모습 때문에 사진 찍는 것이 싫었다.
그나마 봄, 여름 산책길에는 나무와 꽃이 많이 피어서 사진을 좀 찍긴 했지만
삐삐가 떠난 가을이 되니 낙엽이 비로소 눈에 들어왔다.
이런 때에 삐삐와 함께 있는 사진이 없어서 슬프다.
이미 전화기 안에는 수백 장의 사진이 있지만 그때의 기억이 모두 새롭고 아쉽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남편과 내 생일 때마다 케이크에 촛불을 켜고 사진을 찍는데 그때마다 삐삐도 늘 함께 했다.
나는 삐삐를 안은 채 최대한 행복한 웃음을 짓고,
삐삐는 언제나 예쁜 얼굴로
주인공처럼 참석했는데 이제 없다.
셋이던 사진에서 둘 뿐이니 허전하다.
심드렁한 표정도 좋고 다른 곳을 쳐다보는 삐삐여도 좋다.
내 옆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특히 해가 바뀌는 연말에는 많이 슬펐다.
어느 날은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터지곤 했는데
2019에서 2020으로 넘어가는 숫자가 남다르게 느껴져서 더욱 견디기 힘들었다
삐삐는 10월에 떠났지만 나의 가을, 겨울은 그 자리에서 멈추어 버린 듯했고
집 앞에서 산 패딩 하나만 줄곧 입고 다녔다.
이전에는 빨간 코트와 망토, 매일 나갈 때마다 옷을 바꾸어 입었지만 올 겨울은 다르다.
아무런 의욕도 생기지 않고 어떤 노래 가사처럼 12월 32일 같고 33일 같고.. 꼭 자리에서 멈추어 버린 것 같다.
나는 요즘 좀 더 빨리 내가 미장원에서 데리고 왔더라면...?
이런 생각을 많이 한다.
내가 미처 못 했던 일들이 아쉽고 후회스럽기 때문이다.
삐삐는 종일 나를 쳐다보며 주시하다가 내가 움직이면 따라 움직였다.
다리 수술을 하고 불편할 때도 나를 쫓아다녔기에 나는 집안에서 최소한으로 움직였다.
거실에서 방으로 들어가는 것도 눈치를 봐야 하고
삐삐가 누워서 잘 때 살금살금 몰래 다녔다.
그래도 삐삐가 나를 쳐다보는 눈빛은 얼마나 그윽했는지 지금도 꼭 어디선가 나를 쳐다보는 것 같다.
마치 꿀이 뚝뚝 떨어지는듯한 삐삐의 그윽한 눈길을 받을때 마다 행복했다.
뒤돌아 생각해보면 제이피 역시 나의 껌딱지였다.
내가 앉아서 제이피를 안고 있어도 확인하듯 머리를 뒤로 돌려 나를 올려 다 보곤 했다.
나는 그 모습이 너무나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제이피도 삐삐도 나를 떨어지기 싫어하던 녀석이었는데
그들은 어떻게 나를 떠났을까?
언젠가 큰 딸이 나에게 서운함을 토로한 적이 몇 번 있다.
제이피는 다 잊어버린 것 같다고..
실제로 나는 삐삐 덕분에 제이피를 많이 잊고 지냈다.
(삐삐야 너와 함께 있는 동안 정말 행복하고 고마웠다)
삐삐는 하루에 2-3번씩 바람을 쐬러 데리고 나갔는데
집이 더러워지는 까닭이 삐삐 탓이라고 생각했지만
삐삐가 떠난 후 그게 아니었음을 깨닫고 나니 그것도 미안한 노릇이다.
근처에 아파트 단지가 들어오기 전에는 산책할 곳이 마땅치 않아서 주말엔 가까운 대학교 캠퍼스에 갔다.
처음엔 삐삐가 차를 곧잘 타더니
언젠가부터 짧은 거리에도 가는 내내 짖어 댔다.
신호에 걸려 잠시 차가 멈추면 더 짖어댔는데 아마도 집을 나가는 것이 흥분되어서 그랬던 것 같다.
삐삐는 부산에 살면서 한 번도 바다 구경을 못 했다.
바닷가에서 뛰어놀다가 돌아올 때는 모래 때문에
차가 엉망이 되어 세차며 삐삐를 씻기는 일이
번거로워서 갈 엄두를 못 냈던 것이다.
마침 집 앞으로 공원이 생기는 바람에 나중에는 미처
바닷가까지 데려갈 생각을 안 했지만 그 역시도 미안하고 후회스럽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바다가 있는데 모래 바닥에서 실컷 놀게 하지 못한 것이 마음 아프다.
왜 그때는 그런 생각을 못 했을까? 언제든 갈수 있다고 믿었기에
또 이렇게 금방 내 곁을 떠날 것이라고 짐작 못했기에 그랬것 같다.
남편과 나는 삐삐를 차에 태워서 아버지가 계신 청평에 한번 다녀오자고
여러 번 벼르었는데 끝내 가지 못했다.
그곳에는 엄마의 납골당과 우리 집의 마지막 개 센 이 묻혀 있는 곳이기도 한데
아버지께서 노후 생활을 위해 집을 짓고 들어가신 전원주택이다.
삐삐에게 마당이 있는 넓은 곳에서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뛰어놀 수 있는 시간을 주고 싶었지만
부산에서 청평까지 긴 시간 동안 자동차를 태우고 가야 하니
삐삐가 힘들 것 같아 늘 생각만 했던 것이다.
그리고 과연 겁쟁이 삐삐가 낯선 곳에서 뛰어놀까 싶기도 했고.
종종 산책을 나가면 개 종류가 뭐냐고 묻는 사람이 많았는데
(전주인이 비숑과 조금 섞였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해주었다.)
아무래도 비숑이라고 하긴 좀 어설퍼서
나는 조금은 수줍게 ‘비숑..’이라고 알려주면 대부분 “그렇죠” 하며 수긍을 해주었다.
당당히 말하지 못한 것은 내가 보기에도 비숑과 좀 다른 모습이었기 때문이었지만
사실 그것은 내게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똥 개라고 해도 나에겐 더없이 소중한 내 아이였고
여태껏 잡종인지 순종인지 그것을 가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한 번은 내가 이 이야기를 친구에게 했더니 비숑이 아닌 '가숑'이라고 별명을 짓기도 했는데
나 스스로 우리 개는 가숑이라고 장난스레 먼저 이야기를 꺼내기도 했다.
어디서 어떻게 왔던 나에게는 한없이 소중하고 귀한 아이였으니까.
사랑한다! 많이 많이 삐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