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큰 딸이 전화로 요즘 ‘개는 훌륭하다’라는 프로를 보고 있는데 엄마 생각이 많이 난다고 했다.
딸 내외는 아이가 없기 때문에 언젠가 개를 기를 생각이 있다고 말하곤 했다.
물론 당장은 아니고 몇 년 후가 될지 모르지만 개를 기를 마음이 있다는 건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딸은 제이피를 무척 아끼고 같이 자랐기에 개에 대해서 익숙한 편인데 미국으로 떠나면서 이별 아닌 이별을 하게 되었고, 삐삐는 한국에 와서 몇 번 보는 정도였으니 그저 신기하고 귀여운 강아지 정도로 지켜보았다.
삐삐가 사람을 물고, 많이 짖고, 산책을 나가면 다른 개들에게 덤비고 아무튼 문제견이라는 건데 딸은 ‘미친개’라고 놀리며 그렇게 힘들어서 어찌 개를 기르겠느냐?고 했었다.
그런데 그 프로를 보니 모두 엄마가 잘못 키운 탓이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나도 그 프로를 몇 번 본 적은 있지만 사실 일부러 보지 않았다.
강형욱 훈련사를 보며 좋은 사람이고 대단하다고 느끼면서도 개들이 나오면 그저 외면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직은 삐삐를 보낸 상처가 아물지 않아서 개 자체를 부정하고 싶은 마음인데
딸은 엄마처럼 그렇게 개를 힘들게 길러서야 어찌 개와 함께 살겠냐고 하는 말을 자주 했다.
외출도 자유롭지 못하고 여행 떠나기가 힘드니 그걸 오래 지켜본 딸 눈에 걱정스럽고
앞으로 자신이 어찌해야 할지 미리 교육이나 훈련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다.
비로소 우리 삐삐가 문제견이었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데리고 있을 때는 힘들었을지 몰라도 그걸 고생스럽다거나 싫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삐삐가 나를 힘들게 한 것이 아니라 내가 삐삐를 힘들게 만들었고 잘못된 교육으로 문제견으로 살게 만들었다는 말인가? 내가 우물쭈물 말을 잇지 못하자 딸이 눈치를 채고 한발 물러서는 듯 변명을 했다.
“허긴 개가 짖는데 그냥 내버려 둘 수 없으니 안고 잡는 것인데 그걸 개는 자기가 잘했다고 생각한다지 뭐야!
또 막상 내 강아지가 생기면 엄마처럼 할지도 모르지... “
나는 개에게 먹을 것을 앞에 두고 ‘앉아’ ‘일어나’ ‘기다려’ ’ 손 줘 ‘ 등의 훈련을 질색했다.
같이 살면 말귀를 알아듣는데 구태여 그런 걸 왜 시키는지 이해가 안 갔고
남편이 ‘엎드려’ ‘뒹굴어’ ‘손’ 이런 것을 가르칠 때마다 하지 못하게 말렸다.
처음엔 곧잘 했는데 내가 못하게 해서 그만두었고
자연스럽게 엎드리고 뒹굴긴 했지만 그건 훈련이 아니라 삐삐의 버릇이었다.
물론 훈련사가 가르치는 교육은 다르지만 짖을 때 ‘쉬’ ‘그만’ 하는 소리는 수십 번 해도 별 소용이 없었다.
나는 삐삐를 제이피와 달리 새끼 때부터 기르지 않았으니 어렸을 때 익힌 잘못된 환경과 교육 탓이라고만 생각했다.
사람으로 치면 성격이 형성되는 시기를 지나 이미 늦었다고 생각했으며 병원에 가서 물어보기도 했었다.
의사 역시 부정적으로 대답하며 훈련소에 가면 때리는 경우가 많다고 했는데
사랑을 충분히 준다면 달라질 것이라 믿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사랑해주고 산책하는 일뿐이라고 믿었고 삐삐의 상태가 그렇게 심각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내가 감당하고 조심하면 될 일이라고....
전화를 끊은 후 곰곰이 생각했다.
이미 삐삐는 떠났으니 다시 되돌려 생각할 필요도 없었지만 어쩐지 억울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너무나 엉망으로 데리고 살았다는 자책이 아니라,
결코 개는 교육만으로 인형처럼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라는 말을 해주고 싶었다.
개에게도 자기만의 성향과 버릇이 있고 사람과 마찬가지로 혼자 집에 있으면 외롭고 우울해하며
개는 원래 짖도록 되어 있다는 것을...
안 짖는 개가 어디 있겠는가? 낯선 사람이 집에 들어오는데 가만히 있으라고?
딸이 나를 비난한 건 아닌데 ‘너도 한번 데리고 살아봐, 그리 만만 한가’ 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거 같다.
남의 자식들은 모두 편하고 쉽게 키운 것처럼 보이는 법이니.
이게 다 내 자격지심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