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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미 Dec 04. 2020

마중

마지막 이야기

2020년 봄, 여름


봄이  슬며시  다가왔다.

아니 봄은 이미 왔는데 내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채 봄을 맞았고 벚꽃이 피어난 것을 보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나무들은 그 나무가 무슨 나무인지 꽃이나 열매를 맺기 전에는 잘 모른다.

특히 벚나무는 꽃이 사라지는 긴 시간 동안  잊어버리다가 비로소 피어난 꽃을 보고 다시 환호한다.


벚꽃을 보니 제이피와 함께 한 옛 추억이 생각났다.

솔직히 미안하지만 삐삐로 인해서 제이피를 많이 잊고 살았고

삐삐를 보내고 난 후로 제이피가 같이 떠오른다.

그 녀석에 대한 기억은 삐삐만큼 아프지 않고 담담한 편인데 아마도 언젠가 삐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어느 날 벚꽃 잎이 바람에 날려서 꽃비가 떨어지는 자리에 내가 서 있었고, 거기에 제이피가 함께 있었다.

동네 골목에 아무도  없었고 골바람이 휘몰아치니

분홍색 꽃비가 바람에 날려 마치 춤추는 것처럼 날아다녔다.

제이피는 꽃잎을 따라 움직였다.  

날리는 꽃잎을 잡으려고 이리저리 뛰고

축축한 코에 꽃잎을 붙인 채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는 말을 실감했다.

그때 난 행복했고, 문득 그 광경이 사진 찍힌 듯 떠올랐다.


삐삐는 아니 개들은 당연히 꽃이나 나무에 별다른 감흥이 없다.

산책 중에 아름다운 자연을 감상하는 것은 사람의 몫이고

개들은 그저 바닥을 킁 킁 대며 냄새 맡기에 바쁠 뿐이다.

그러나 곁에는 늘 개들이 있었고  함께 였다.

비로소 제이피가 내게 첫사랑이고  삐삐가 마지막 사랑임을 깨닫는다.


지난 1월 말부터 코로나 19가 나타나면서 세상은 완전히 달라졌다.

나는 이미  삐삐가 떠난 후  일상이 멈춰 버린 듯했는데  그 이후 또 다른 변화로 더욱 얼어붙었다.

더구나 혈압 당뇨가 있는 노년층이라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는 남편의 걱정으로

피트니스 센터는 휴회하고 집안에서 칩거 중이다.

20년 동안 아침마다 출근하듯 다니던 일상이 사라지고

극히 단순하고 멍한 상태로 인생을 은퇴한 노인처럼 시간과 씨름하며 지내고 있다.

지금의 나는 삐삐의 이름을 부르며 아침을 시작하는데 한때 아침 시간이 너무 바빠서 짜증이 났었다.

하지만 그날이 그날 같은 지루한 나날을 보내고

낙을 찾아볼 수 없는 살벌한 상태의 고비를 넘기고 보니 시간이 흘러 어느덧 7월이 되었다.

3개월 동안은 죽음 같이 어둡고 캄캄한 시간이었고 봄이 되어도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힘든 시간이 더디게  흘러간다고 생각했는데 이미 갇힌 생활이 6개월이 지났다는 게 새삼 위로가 된다.

내년 봄이면  밖에 나갈 수 있으려나?  앞으로 6개월?


이번 코로나를 겪으면서 ‘ 나 혼자만 힘든 것이  아니니까’ 하며 참고 견뎌내고 있으며

전 세계의 사람들이 모두 겪고 있으니, 거창하게 말해서 인류애가 느껴지고 지구를 걱정하는 마음이 생겨나기도 한다.

그러나 바이러스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적이니 더 두렵고 사람에 대한 불신과 의심으로 자꾸 피하게 된다.


남편은 이제 우리의 삶은 코로나를 겪은 이후와 이전이 많이 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백신이 개발되고  전염병이 물러난다고 해도 이전과 똑같은 생활,

즉 ‘우리가 일했던 방식, 소비하던 방식, 여행하던 방식, 모이던 방식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하게 될 것이다. ‘라는 블랙록(Blackrock) 래리 핑크 회장의 말을 들려주며 열변을 토했다.


나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코로나가 일상을 뒤엎어 버린 것이지만 노년의 삶을 미리 체험하면서 살고 있고 앞으로 그처럼 단순하게 살게 될 것이라는 것을...

그래서 힘들지만 익숙해지려고 애를 쓰고 서글픈 마음도 들며

다시금 삐삐의 존재가 그립고 그립다.


내가 밖에 전혀 나가지 않는 이런 때에 삐삐가 있었다면 얼마나 좋아했을까? 생각해보곤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산책도 겁이 나서 제대로 못 나간다면 삐삐는 또 얼마나 힘들었을까?

병원도 뻔질나게 드나들어야 했을 텐데 등 등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적당한 시기에 엄마를 위해서 삐삐가 서둘러 떠났을까? 하는 결론에 이르자 몹시 미안해졌다.

이상하게 삐삐에겐  제이피와 달리 애틋하고 미안한 감정이 더 많이 남아 있다.

아이들은 내가 제이피를 더 사랑했던 것 같다고 했지만 누굴 더 사랑했는지? 그건 중요하지 않다.

그 순간마다 난 녀석들을 사랑했는데 그저 삐삐 다리 수술을 두 번 씩이나 하고 보낸 것이 마음에 걸린다.


병원에서 나는 삐삐가 봄까지만 살아 달라고 빌었는데 겨울도 넘기지 못하고 떠났다.

화려한 벚꽃을 나 혼자 보면서 이번 봄은 찬란하지 않아서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나는 매일 하루에 한 번 30분씩 동네를 걷는 것으로 운동을 대신하는데 그것이 유일한 외출이고 단순한 생활이지만 그 시간에는 오롯이 삐삐와 대화를 한다.

밖으로 나가서 걸을 때면 ‘안녕 삐삐’ 이런 인사를 시작으로 발걸음을 뗀다.

아직 이름만 불러도 사무치게 그립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고인다.

마스크를 쓰고 혼자 걷고 있으니 누구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고 혼자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어서 30분이 금방 지나간다.


특히 나는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고 하는 그 시간이 가장 외롭다.

석양이 저무는 황혼이나 깊고 푸른 밤의 기운이 스며들어 어둠과 빛이 서로  바뀌는 시간.  

저기 있는 동물이 내가 키우는 개인지 아니면 나를 공격할 늑대인지 분간이 안 되는 때를 일컫는 그 시간이  찾아오면 걷잡을 수가 없다.

어릴 때 간혹 낮잠을 자다가 깨어 슬며시 눈을 뜨면 나 혼자 뿐인 방 밖에는 어둠이 내려오고  

부엌에서 풍겨오는 밥 냄새 그리고 작은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어쩐지 슬퍼져서 혼자 울곤 했다.

그때부터 그 시간이 찾아오면 어른이 된 이후에도  간혹 세상에 나 혼자인 것 같이 쓸쓸하고  외롭다.

그럴 때 곁에 삐삐가 있어야 했고 그 이전에는 늘 함께 있었는데

과연 육신은 사라졌는데  영혼의 만남이 가능한 이야기 일까?


‘개는 자기 자신보다 당신을 더 사랑하는 이 세상의 유일한 생명체일 것이다 ‘라고  

누군가의 말을 인용하지 않아도 제이피와 삐삐는 자신보다 나를 더 사랑했다.

아직도 가끔 나는 “삐삐야, 삐삐야‘ 하며 미친 사람처럼  혼자 소리쳐 부르며 걷기도 하고  

여전히 삐삐가 바닥에 엎드려 있다는 착각으로 움찔 거리며 발을 옮기고, 외출을 하면 성급히 돌아온다.

남편이 “왜  우리가  이렇게  급하게  집으로 향하는 걸까?” 하며 웃는데

10년을 그렇게 살았으니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아침마다 아파트 2층에 오줌을 뉘러 나가면 만나는 개가 있었다.

몇 번을 삐삐가  공격할 듯 덤벼서 놀란 적이 있는데 다른 개를 보면 몹시 흥분을 하므로 피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더구나 아파트 정원 공간은 작고 막힌 곳이라 다른 개가 나오는 시간을 피할 수밖에 없는데 번번이 마주쳐 하는 수 없이 주인에게 보통 아침 몇 시에 나오느냐고 물어봤다.

그 여자는 매너가 있고 침착하게 개를 잘 대처하는 면이 좋아 보여서 실례를 무릅쓰고 말을 걸었다.

그 개는 무려 18살이라고 하며 몸이 좋지 않아서 하루에 몇 번을 잠시 데리고 나온다고 했다.

시간을 물어봤는데  자기가 눈 뜨면 바로 데리고 나온다는 대답을 하니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어쨌든 시간을 피해 아슬아슬하게 다녔다.

한데 이제 삐삐도 없고 나 혼자 그곳을 걸으며 운동을 하는데 여전히 그녀와 개는 걷고 있었다.

한동안 나는  마스크를 썼으니 알아보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모르는 체했다.

내가 혼자 인 것도 싫었고, 왜 혼자인지 혹시 그녀가 물어볼까 봐 두려웠는데

잘 모르는 사람 앞에서 눈물을 쏟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그 개의 뒤를 따라 걷는데 배 쪽에  아주 커다란 혹이 달려 있는 것을 보았다.  

어른 주먹보다 더  큰 혹이 매달려 있는 것을 보았고 자기 개가 나이도 많고 몸이 안 좋다는 말을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다.

사실 삐삐를 데리고 있으면 다른 개를 쳐다볼 여유가 없어서 미처 못 봤던 것이다.

개 종류는 프렌치 불독인데  마주쳐도 조용히 피하는 순한 녀석이었다.


그 날은 내가 먼저  말을 걸며 인사를 했다.

그녀는 이미 나를 알아봤지만 내가 피하니 그녀도 아는 체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난 스스로  삐삐가 얼마 전에 떠났고 그래서 내가  모르는 체했던 것이라는 고백도 했다.

그 개의 혹은 수술을 하려고 해도 크기가 너무 크고 마취 등의 문제로 나이가 많아 위험하며

혹시 전이가 될 염려가 있어서 내버려 둔다고 그녀는 묻지도 않는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난 그녀가  부러웠는데 18살이라는 나이에도 산책을 몇 번씩 나오는 것이 신기했다.

얼마나 관리를 잘하면  저렇게 장수하도록 데리고 함께 할까?

그런 생각에  내가 모두 잘 못 한 것 같은 죄책감이 들었고  겨우 12년을 살다 간  삐삐에게 미안했다.


동네에  또 한 명의 주민이 있는데  그 개는 이탈리안 그레이 하운드 종으로 추측된다.

이미 그 개를 본지 몇 년이 지난 터라 새삼스레 그 종을 묻기도 우습기 때문에 다시 묻지 않지만  

처음 봤을 때  참 특이하고  잘 생긴 개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남편과 나는 그 개를 귀족견이라고 불렀는데 그 주인 부부는 나이가 많은 사람들로 특히 부인이 아주 친절한 분이었다.

삐삐와 산책하면서  자주 마주쳤지만 가까이 가지 못하고  멀리서 인사만 했다.

간혹 서로 엘리베이터에서 만날 경우에는 삐삐 안부를 자주 물어봐주던 부인이라  

삐삐가 다리 수술, 심장병이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고  걱정도  해주는 따뜻한 사람이었다.

어느 날 삐삐를 보내고 남편과 둘이서 산책을 가려고 아파트 뒷문을 나서는데 그녀와 마주쳤다.

그녀는 “왜  둘이서만”? 하며 물었고 나는 그만 울음이 터져버렸다.

그녀가 눈치를 채고 두 팔을 벌려서 나를 안아주었는데 모르는 사람 품 안에 안겨서 소리 내어 엉엉 울었다.


동네에는 산책 나오는 개가 많다.

그들을 흘끗 보긴 하지만 이상하게 다른 개를 쳐다보고 싶지 않다.

이유는 질투심이랄까? 복잡한 감정에 휩싸이는데 개를 보면 부럽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다.

나에게도 개가 있었던, 한때  당신만큼 개를 사랑하고 산책을 하고 개를 싫어해서 피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말을 하고 싶고, 언젠가 저 예쁜 강아지가 아프고 병들고  죽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마음 아프기 때문이다.


남편 말대로 삐삐는 내 곁에 있고 나를 따라서 걷고 있을 것이다.

단지 내 눈에 보이지 않은 것뿐이라고 생각하며..  

엄마가 세상을 떠난 후 다시 만나자고 하기보다,

내가 죽는 마지막 순간 삐삐가 데리러 오면 좋겠다는 소원을 빌게 되었다.


아마 내가 죽을 때  삐삐가 온다면 두려워하지 않고 담담히 이 세상을 떠나

삐삐를 따라가게 될 것이라는 바람과 함께 꼭 그래 주기를 기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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