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상담, 그 이후

위로받을 수 있는 마음

by 제인


일기를 쓰지 않은 지가 꽤 되었다.

별다른 이유는 없지만 시험 준비에 바쁘기도 했고, 내 마음이 계속 힘들어서 오히려 일기장에 손이 잘 안 갔다. 슬픔에 흠뻑 절여진 마음을 밖으로 내뱉으면 왠지 그 슬픔이 더 커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생각이 많아서 더 그런 건지, 요즘 너무 힘들다. 힘들다는 말을 입 밖으로 내뱉지 않고 싶었지만, 솔직히 마음이 많이 힘들다. 이제 벌써 10월인데, 저번달보다 마음이 훨씬 더 힘들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이게 외로움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마음 한가운데에 지름이 큰 우물이 생긴 것처럼 속이 텅 비어 공허한 느낌이다.


계속 제자리를 맴돌고 있는 기분이 든다. 어느 날은 그냥 그런 시기인가 보다, 아직 내가 힘든 시기인가 보다 생각하며 흘려보내자 하다가도, 또 어느 날은 일부러 떠올리려고 하지 않았던 헤어졌을 당시 그 순간의 슬픔에 일부러 내 마음을 흠뻑 적시기라도 하듯 엉엉 울었다. 후자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 보게 된다. 어쩌면 이런 감정, 상황을 내가 극복하고 싶지 않은 건 아닐까? 그때가 그리우니까, 다시 돌아가고 싶으니까, 나 스스로에 대한 원망과 자책이 잠재워지지 않으니까 일부러 내가 슬픔을 쥐어짜 내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것 같다.




어제는 친한 회사 동기들을 만났다. 헤어지고 나서 거의 하루 종일 웃을 일이 없다 보니 친구들을 만나서 웃는 게 어색하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그렇지만 즐거웠다. 정말 오랜만에 밖에서 밥도 먹고, 걷고, 커피도 마시는 그 순간이 참 소중했다. 한 친구는 일이 있어 먼저 가고, 남은 한 친구(이하 '은'이라고 칭하겠다)와 저녁을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요즘 상담받는다는 얘길 했다. 헤어진 이후 단 한 번도 은에게도, 나와 가장 친한 고향 친구들에게도 내가 힘들다는 얘기를 하지 않았다. 차라리 만날 때 이야기하지 말고 헤어지고 나서 힘들다고 실컷 얘기할걸. 그럼 후회라도 없었을 텐데. 무튼, 그래서 은이는 내가 상담을 받는다는 것도, 내가 지금도 힘들어하고 있다는 것도 당연히 모르고 있었다. 꽤 놀란 눈치였다. 상담 이야기를 하다가 순간 선생님이 내준 미션이 생각났다. 그래서 난 은에게 얘기했다. "은아 나 요즘 힘들어. 이거 이번주 상담 미션이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믿지 못해서, 그 사람을 믿지 못하는 나 스스로를 또 믿지 못해서, 내가 그 사람과 부딪혀서 힘든 순간들에 나는 내 주위 친구들에게 그 사람의 이러이러한 면이 힘들다고 얘기했다. 의도는 그게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 사람의 입장에선 흉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인지하지 못했다. 내가 나를 믿지 못해서 그 모든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그래서 난 너무 창피했다. 그리고 이런 내 상태를, 힘듦을, 아무리 친한 사람에게라도 말하지 말아야겠다, 이상한 타이밍에 다짐을 하게 되었다. 내가 힘들다는 이야기를 하면 친한 친구라도 그 말 자체가 짐이 될 것 같았다. 부정적인 말이니까, 공감이 가지 않는데 공감을 해줘야 할 것 같은 그런 부담일 테니까.


그렇지만 그 타이밍엔 이상하게 용기가 났다. 그래서 용기 내서 이번주 상담 미션을 수행했다. '곁에 있는 누구라도 한 명 붙잡고 나 힘들다고 털어놓기.' 그런데 이 얘기를 꺼내야겠다고 생각한 그 시점부터 입술이 떨리고 눈물이 고였다. 은은 나에게 울어도 괜찮다고 했다.

나의 이런 상태를, 마음을, 사람들이 공감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은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은은 차분한 목소리로 나에게 이렇게 얘기했다. "그냥 네가 아직 힘든 시기인 거 아닐까?" 그 한 마디가 참 위안이 됐다.


내가 힘든 줄 몰랐다고 얘기했다. "제인이 네가 그 사람을 정말 많이 좋아했구나, 그러면 그럴 수 있지." 하며 은은 널뛰는 내 마음을 진정시켜 줬다. 그리고 은의 예전 이야기를 해줬다.


"결은 다르지만, "이라는 말로 시작하는 은의 이야기는 나에게 참 많은 위로가 됐다. 은이 정말 많이 사랑했던, 정말 부득이한 사정 때문에 그녀가 먼저 이별을 고하게 된 예전 연인의 이야기였다. 이전에도 한 번 들은 적이 있었다. 그땐 헤어졌던 이유만 들었었고, 그 당시 은의 감정에 대해선 듣지 못했었다. 그런데 그 사람 이야기를 하는 은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때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난다고. 어쩔 수 없이 이별을 먼저 고했는데, 괜찮아지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했다. 이후 어쩌다 연락이 닿아 만날 일이 생겼는데,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만났을 때에도 여전히 그가 너무 좋았다고 했다. 그러고 나서 다시는 만나지 않았지만, 그 사람은 SNS 상태메시지에 정승환의 '눈사람' 노래 가사 일부를 적어놨다고 했다. 그래서 한 동안 그 노래를 들을 수도, 제목을 쳐다볼 수도 없었다고 했다. 그 생각만 하면 마음이 너무 아프고 눈물이 나서.


내가 아는 은은 감정이 쉽게 동요되는 사람이 아니었다. 나에게 그녀는 항상 단단하고 심지가 곧은, 나보다 훨씬 냉철하고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녀의 눈시울이 붉어진 걸 보고 나도 눈물이 났다. 그리고 은은 나에게 네가 힘들다는 얘기 전혀 부담 아니니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언제든 얘기하라고 했다. 정말, 정말 많이 고마웠다.


은과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그 노래를 들어봤다. 익숙한 멜로디였는데 가사는 한 번도 들여다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가사를 보니 은이 왜 그 노래 제목을 쳐다도 보지 못했는지 단 번에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참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면서 온 마음을 쏟아서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또 같은 농도의 사랑을 받는 경험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인생에서 그런 시간을 지나오고 그런 경험을 했다는 것 자체가 정말 소중하고 귀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가 더 멋져 보였다. 그렇게 사랑했던 사람을, 그 시간을 마음 한 켠에 묻어두고 현재 자신의 삶을 또 씩씩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정말 멋지고 성숙해 보였다.


그렇게 집에 와서 화장대 앞에서 많이 울었다.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온 것과는 별개로, '눈사람' 노래를 듣는데 계속 눈물이 났다. 은의 옛 연인이 그녀를 얼마나 아꼈는지 그 가사를 보며 느껴졌고, 그리고 상황은 전혀 다르지만 그 노래의 가사가 나에게 하는 말로 들리기도 했다. 또 나인 것 같기도 했다. 끝눈이 오고 겨울이 지나면 그대에게도 봄이 찾아올 거라는 말. 그렇지만 난 영원히 여기 머물러 있을 거라는 말.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우리의 그 순간을 붙잡아 보고 싶다는 말. 나를 위로해 주는 것 같기도 하고, 또 내가 하고 싶은 말인 것 같기도 하고 해서. 울려고 운 게 아니라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한참을 울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지금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건 그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 아니다. 당장 그 사람을 만나지 못해서가 아니다. 그 사람의 힘듦을 이제야 이해하게 된 것, 그가 그리고 내가 왜 힘들었는지 그 이유를 이제야 알게 된 것, 그 이유가 다름 아닌 나 자신을 믿지 못했기 때문이었다는 것. 나 스스로를 용서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책도 보고 영상도 보고, 그렇게 얻은 많은 지식들로 난 이미 충분히 알고 있다. 내가 지금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가야 하는지 내 머릿속으론 모든 정답을 다 알고 있다. 하지만 마음이 그렇게 잘 되지 않는다. 내가 나에게 너무 무책임한 건지, 나의 일상에 대해, 나 스스로에 대해 너무 무책임하게 방치하고 과거에만 목을 매는 것은 아닌지 그런 부분에 대한 자책도 든다. 정말 잘 모르겠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시간이 흘러가면 예전처럼 다 괜찮아질까? 지금 당장은 잘 모르겠다.


그래도 난 밥을 챙겨 먹고, 잠도 자고, 자소서도 쓰고, 공부도 하고, 대학원도 다닌다.

내가 나를 또 혼낼게 아니라, 마음이 힘든데도 내가 해야 할 것들을 놓치지 않고 하고 있는 나를 칭찬해줘야 하는 거 아닐까? 큰 게 아니더라도, 내 일상을 그래도 살아가고 있는 것만으로도 잘하고 있다고. 다 그럴 수 있는 거라고, 힘들 수 있는 거라고.


은은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네가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더 힘든 건 아닐까? 나도 그 사람과 헤어지고 괜찮아지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거든."





그래, 난 아직 힘들다. 마음정리도 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 보자. 그냥 솔직하게 인정하자. 아직 힘들다고. 그리고 그런 나를 스스로가 창피해하지 말자. 그 누구도 아닌 내가 가장 먼저 나의 이런 모습을 괜찮다고 이야기해 주자.





2023년, 바람의 결이 달라진 10월의 초입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