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달마다 마주한 이별들
시간은 느린 듯 빠르게 흘러서 24년의 봄과 여름을 지나고 있다.
이제 막 입추가 지난 시점까지 올해는 참 유난스럽게도 두 달마다 마음 아픈 이별을 했다.
2월에는 친한 동생의 남편이 세상을 떠났다.
나는 동생의 결혼식에서 몇 달 전부터 연습한 다비치의 아로하를 축가로 불러주었었다.
알콩달콩 예쁘게 잘 살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떨리는 목소리를 예쁜 가사로 덮었다.
나의 축가가 끝난 후, 행복한 신랑은 폴킴의 노래를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신부에게 불러주었다.
그런데 신부는 더 이상 신랑의 달콤한 목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되었다.
넋이 나간채로 목 놓아 우는 동생에게 어떠한 말로도 위로를 할 수가 없었다.
함께 있어주고 동생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기도해 주는 것, ‘괜찮냐’는 사람들의 물음이 가장 힘들다는 동생 곁에서 그저 눈을 맞춰주고 안아주는 것.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로부터 2달 뒤, 4월 11일. 아빠가 천국으로 이사를 갔다.
아빠는 간암이 재발한 상황이었고 당뇨와 췌장염으로 인해 38kg까지 몸무게가 빠져
더 이상의 항암치료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병원에서 3개월 시한부 판정을 들었을 때만 해도 막연히 그 보단 더 살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고관절이 부러져 요양병원에 입원한 지 3주 만에 뭐가 그리 급한지 훌쩍 떠나버렸다.
딸의 목소리도 듣지 못하고 얼굴도 보지 못한 채로 급히 떠났다.
병원에서 아빠가 음식을 드시지 못한다고 할 때, 아빠를 보러 갈걸.
한 번만 더 위급하다는 전화가 오면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미뤘던 그날의 내가 바보 같았다.
알코올중독 때문에 가정적이지 않은 아빠였다는 이유로 나는 아빠를 한평생 미워했다.
그래서 아빠가 떠나기를 바라던 못난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막상 아빠가 멀리 떠나니 미안한 마음과 예측하지 못했던 그리움이 생겨났다.
아빠가 혼자 외롭게 살았던 집을 정리하고, ‘사랑하는 딸’로 나를 저장해 둔 아빠의 핸드폰도 해지했다.
혼자 자기가 무서워서 밤에 잠이 잘 안 온다던 아빠에게 볼멘소리를 했던 못난 딸은
이제야 아빠가 겁냈던 밤의 두려움을 조금이나마 공감한다.
아빠를 보내고 마음이 조금씩 괜찮아지려던 6월 무렵,
6월 14일에 10년을 애지중지 키운 강아지가 강아지별로 여행을 떠났다.
1년 전에 심장병과 급성 폐수종 진단을 받은 이후로 강아지의 건강은 계속 좋아지지 못하고 있었다.
수의사 선생님도 강아지가 언제든 떠날 수 있으니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하셨다.
하루 3번, 사람도 먹기 힘들 쓰디쓴 약을 먹이는 건 전쟁이었다.
안 먹겠다고 고개를 요리조리 돌리는 강아지를 매번 1시간이 넘게 어르고 달래서 겨우 먹였다.
심장병 진단받은 이후로는 그 좋아하던 산책을 한 번도 나가지 못했는데,
떠나기 몇 주전부터는 반짝 컨디션이 좋아져 5분 산책도 하고 맛있는 것도 잘 먹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쓴 약의 맛을 가려줄 새로운 간식이 맛있어서 너무 흥분을 했던 걸까.
낮에 물설사를 세 번한 강아지를 두고 출근을 하는 마음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같이 있어주기를 바라는 듯한 강아지의 눈빛을, 나는 3-4분 남은 지하철 도착 예정 시간에 묻었다.
퇴근하고 돌아오니 이미 아이는 경련이 오래되었는지 눈이 풀려있고 온몸에 힘이 빠져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끝내 최선을 다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좋아하던 산책길을 마지막으로 걷고, 병원에 가서 산소마스크를 씌웠다.
그 와중에도 산소마스크가 싫다고 고개를 이리저리 빼내려는 모습이 끝까지 내 강아지다웠다.
병원에서 혈변을 보고 혈토를 하는 것을 보고 이제 정말 마지막이 왔음을 알 수 있었다.
몇 번을 사랑한다고, 편히 가도 된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어떻게든 살아주길 바랐다.
하루만, 몇 시간만, 아니 몇 분만 더.
집으로 데려오던 길에 자자곡 “날씨가 좋아서 기분도 좋다네”를 부르던 그 길목,
새벽 두 시경 내 강아지는 강아지 별로 신나는 소풍을 떠났다.
사실 이 강아지는 15년에 천국으로 먼저 간 내 동생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4살에 사고가 나서 17년을 식물인간으로 살다가 천국으로 간 내 동생은 참 예쁜 아이였다.
언니로 살다가 외동이 되어버리는 바람에 삶의 외로움은 더욱 커졌다.
무기력하고 우울한 날들을 보내던 나에게 강아지는 다시 삶의 활기와 웃음을 선물해 준
내 두 번째 동생이었다.
세 번의 이별에 마음이 온전히 회복되지 않았던 7월의 마지막 날,
사촌오빠의 10살 배기 아들이 갑작스러운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비보가 들려왔다.
어째서인가요, 어째서 이런 일들이 일어나나요.
장례식장에서 친척오빠는 우리 엄마의 손을 꼭 붙잡고 이렇게 말했다.
“이모는 제 마음 아시잖아요. 저도 잘 이겨내 볼게요.”
무슨 말로 위로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엄마에게
나는 먼저 자식을 보내 본 엄마의 존재만으로도 친척오빠와 새언니에게 큰 위로가 될 거라고 했다.
2살쯤 보고 아주 오랜만에 본 사촌 조카는 훌쩍 커서 멋진 어린이가 되어 있었다.
마음이 따듯한 아이 었다는 이모의 말처럼 아이의 웃는 모습이 예쁘고 따뜻했다.
활짝 웃는 사진 아래로 손 때가 탄 토끼 애착인형과 평소 좋아하던 과자, 젤리가 놓여있었다.
친구가 전해주었다는 축구복까지.
나는 10년 키운 강아지로도 이렇게나 마음이 힘든데 자식을 잃은 부모의 마음을 어찌 헤아릴 수 있을까.
떠나보내고 남은 이들의 마음엔 왜 이렇게 한결같이 미안함만 가득한 건지,
하나 있는 아들을 잘 키워보겠다고 고군분투하던 부부의 삶은 온통 자책으로 물들어있었다.
늘 강인하던 이모는 우리 엄마를 안고 엉엉 울었다.
‘난 정말 강한 사람인데 손주 앞에서는 무너지네.’라고 말하는 이모의 벌건 눈시울이
첫 손주를 보낸 할머니의 애타는 마음을 모두 말해주고 있었다.
삶과 죽음. 죽음과 삶.
필연적으로 따라붙는 이 관계 앞에서 나는 자꾸만 숙연해졌다. 아니, 겸손해졌다.
무력감이 찾아올 때 ‘살아있으니 아직은 괜찮다.’라는 마음으로 몸을 일으켰다.
살아있다는 건 그런 것이다.
‘아직 무엇이든 해볼 수 있다는 것.’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는 그 말은 정말이다.
우리는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시간을 살아간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더 많은 가슴 아픈 이별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매일을 잘 살아내야 한다.
내일 일을 알 수 없으니 숨 쉬며 살아있는 오늘에 감사할 수 있다.
잠깐의 이별 뒤 천국에서 다시 만날 날을 바라며 살아갈 수 있다.
오늘 아침은 문득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무서워 눈물이 났다.
또 어떤 슬픈 일이 생길까 노심초사하는 초조한 마음에 덜컥 겁이 났다.
그런데 그 마음이 조금은 우습게도 공원 산책길에 만난 개미를 보고 진정이 되었다.
그 작은 개미가 뽈뽈뽈 열심히 탐색하며 길을 걸어간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생각이라는 게 있긴 한 건지 알 수 없지만
그 작은 생명체도 나름의 하루를 잘 살아간다.
나도 잘 살아갈 것이다. 잘 살아낼 것이다.
살아있다는 건, 어떤 형태의 삶이든 상관없이 대단한 일인 것이다.
저마다의 삶 속에서 지옥 같이 힘든 일들이 찾아와도 살아있기만 한다면 모든 것은 지나간다.
기적과도 같은 매 순간을 감사함으로 버텨내 보는 것이다.
적어도 아직 살아있으니 힘듦도 느끼는 것 아니겠냐는 우스갯소리로 툭툭 털고 일어나 본다.
나는 이 삶을 살아내야겠습니다.
아직 이 세상에 남은 자로서 정말 잘 살아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