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죽 쒀서 개 줬다. 여름이 종말을 알리고 가을이 스멀스멀 다가오면 늘상 하는 생각이다. 학생과 직장인,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애매하게 낀 지 몇 년. 한번 뒤쳐진 20대는 좀처럼 남들과 간극을 좁힐 수 없었다. 초조했다. 수많은 시험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은 늘 부족했고, 그럴수록 나에게 야박한 사람이 되었다. 나에게 야박하니 가족과 친구들에겐 더 야박해졌다.
코끝이 적당히 시린 어느 밤. 상쾌한 가을바람을 맞으며 그날도 역시 습관적 자조와 우울함에 빠져있었다. 그런 나의 상념을 깨운 것은 의외로 언니의 전화였다. 그의 말에 따르면, 아빠가 아파 함께 응급실을 가는 중이라는 것. 장염이다. 아니, 분명 단지 장염 때문일 것이다. 동물적 감각으로 불행이 예견되면, 인간이 최대로 할 수 있는 것은 낙관적 전망이다. 나 역시 그랬다. 아빠는 매년 건강검진을 받았고, 불과 이주 전에도 건강검진을 받았다. 무엇보다 오늘 아침도 함께 먹었다. 그러니 아무 일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낙관적인 기대는 얼마 못 가 모든 명제를 뒤집었다. 그날 밤, 아빠는 우리와 집으로 돌아가는 대신 중환자실로 들어갔다.
잔잔했던 우리 집에 들이닥친 폭풍은 예상보다 더 큰 파동으로 우리 집을 집어삼켰다. 2-3일이면 퇴원할 것이라는 병원의 말과 달리, 아빠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여전히 나를 알아보지 못했고, 입은 굳게 닫혀있었다. 그의 침묵은 너무나도 길어 나에게 주변을 감상할 시간을 줬다. 아빠 옆의 환자들은 매일같이 바뀌었다. 그들은 앞다투기라도 하듯 내가 얼굴을 채 익히기도 전, 쏜살같이 사라졌다. 살아서 나갔을까 가을을 끝으로 생을 마감했을까. 매일같이 사라지는 사람들을 보며 어쩌면 삶과 죽음은 종이 한 장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종이 한 장의 차이가 우리에게도 찾아왔다.
좀처럼 말이 없던 의사는 그날,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다. 모든 중환자실이 그렇듯, 잔인하게도 다음날이 되어야만 환자의 상태를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에게도 오직 30분이라는 면회 시간이 주어졌다. 그 시간만이 아빠가 생과 사의 갈림길 중 어느 곳을 향해가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매일 그 30분을 위한 사투가 시작됐다. 30분을 위해 남은 23시간 30분을 죽여야 했다. 가혹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동안 내가 시간에 쫓겨 하지 못했던 일을 하는 것뿐이었다.
내가 평영 기술을 터득한 것도 그맘때이다. 몇 달간 나는 개구리가 채 되지 되지 못한 채 물속에 가라앉았다. 수영 선생님은 내게 항상 몸에 너무 많은 힘이 들어있다고 했다. 그러나 지난 열흘 동안 뜬 눈으로 밤을 새운 내게 더 이상의 힘은 없었다. 몸에 힘을 빼고 물에 몸을 맡겼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건 내가 지난 몇 달간 찾아 헤맸던 모범 답안이었다. 그렇게 영법을 익히고, 공원에서 산책을 하고, 미뤘던 예능을 보고, 그토록 좋아했던 이와이슌지의 <러브레터>를 보고, 롯데리아의 신메뉴를 먹고, 방을 치웠다.
그동안 미뤄뒀던 일들을 하나씩 해치우자, 아빠는 기다렸다는 듯 기력을 회복했다. 그리고 일반 병실로 옮겼다. 그곳에는 각기 다른 이유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각자만의 방식으로 자신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알츠하이머 남편에게 매일같이 사진을 보여주며 설명하는 80대 노부인, 연명치료를 하는 남편 곁에서 책을 읽는 아내, 키보드를 두드리며 업무를 보는 50대 당뇨 환자. 그들은 어떠한 시간의 구애도 받지 않았다. 그저 조급하지 않게 시간에 몸을 맡겨 헤엄치고 있었다.
가뭄같이 메말라가던 나의 삶에 균열을 낸 건 뜻밖의 비바람이었다. 병원에서의 20일은 나를 바쁘게 만들던 시험들과 면접들을 내려놓게 했다. 큰일이 벌어질 게 분명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내가 처음으로 평영으로 라인을 완주한 다음 날, 의사는 말했다. "이제 퇴원하셔도 됩니다." 9월의 어느 밤, 태풍이 우리 집을 휩쓸고 갔다. 그러나 태풍이 지나간 자리, 우두커니 서있던 화분은 비를 머금고 조금 더 단단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