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곡차곡 쌓여만 간
아빠는 고3 딸에게 매주 편지를 쓰셨다. 가까이에서 있지 않기에 택한 방법일까? 아빠는 딸이 초등학교 6학년에 되던 해에 도시로 유학을 보냈다. 한 아이의 엄마가 되어 보니 얼마나 많이 고민하셨을지, 조금 짐작이 된다. 딸만이 아니고 4학년, 3학년에 올라가는 아들 둘도 같이 보냈으니 말이다.
나는 아들이 7세가 되던 해, 나의 대학 입시 보다 더 고민했더랬다. 인근의 영어유치원 다섯 곳을 방문하고, 조기입학도 고민했다가, 우여곡절 끝에 일반 유치원을 갔지만. 어떤 선택이 아들의 앞날에 도움이 될지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민했던 그 시절이 오버랩된다. 아이가 클수록 더 많은 선택들 앞에 서겠지.
나의 시골집 근처에는 작은 초등학교만 하나 있을 뿐이었다. 중학교를 가려면 버스로 20분, 걸어서 1시간은 족히 걸렸다. 고등학교는 버스로 50분, 걸어서 가기엔 불가능한 읍내에 있었다. 당시 인근의 큰 도시로 하숙이나 자취를 하는 고등학생이 많았더랬다. 지금이야 농촌가산점이 생기면서 도시에도 시골로 고등학교를 다니려 한다지.
그 시절, 왕복 5시간은 더 걸리는 도시로 딸을 유학 보낸 우리 아빠. 그 딸이 고3이 되자 편지를 쓰기 시작하셨다. 하얀 봉투에 하얀 편지지. 그 속에 담긴 검은 궁서체의 마음이 두 장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7년간의 도시 유학생활이 결론지어지는 그 시기, 아빠는 고 3 딸보다 더 긴장하셨을지도 모르겠다.
우편으로 편지를 받을 때의 설렘은 매우 크다. 편지에 담긴 마음은, 그 진정성 또한 얼마나 큰지. 그러나 아빠의 편지는 설렘으로 시작해서 부담으로 끝이 났다. 결국 그 큰 마음의 무게를 매주 감당하기는 벅찼다. 고3인 딸에게 온 우주의 기운을 모아 쓴 편지. 구구절절 열심히 하라는 아빠의 지지와 응원은 조금, 아니 많이 무거웠다.
한 두 번 읽었지만 그 후로는 뜯지도 못했다. 그러나 그 편지의 위력은 대단했다. 딸은 5시경의 새벽 첫 버스로 등교를 시작했다. 교문을 열고, 교실의 불을 켰다. 3교시가 끝나면 10분의 쉬는 시간을 이용해 점심 도시락을 먹었다. 점심시간에는 도서실에서 공부를 했다. 읽지 않아도 알 것 같은 아빠의 마음이 와닿은 것이다.
하얀 편지는 책상 위에 차곡차곡 쌓였다. 쌓이는 편지만큼 고 3인 딸의 열심 또한 서울대 수석감이었다. 그러나 공부법을 몰랐던 딸. 양으로 승부를 봤던 것 같다. 한 달에 영어문제집 1권은 풀었다. 다음 달에 문제집을 또 살 것이 아니라 그 문제집을 다시 보며 모르는 어휘와 문법을 점검했어야 했다. 또다시 보며 여전히 모르고 있는 것을 살피고 반복하고 암기했어야 했다.
엉덩이를 붙이고 엄청난 문제집을 풀기만 했다. 공부한 시간과 다 푼 문제집 수로 대학을 갔으면 1등을 했을 텐데. 해도 해도 아는 것만 더 잘 알고, 모르는 것은 여전히 모르는 공부를 했던 것 같다. 그렇게 고3을 보내고 독서를 통해 배경지식을 강화하고 모르는 것은 제대로 알고 반복과 연습으로 완벽을 기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이미 늦은 것 같은.
요즘 ‘티처스’라는 TV프로그램을 보면서 아이들에게 맞는 공부법을 제시해 주는 것이 한 줄기 빛처럼 느껴졌다. 물론 스스로 깨달으면 좋겠지만 어린 시절에는 반드시 누군가의 지도와 조언이 필요하다. 나의 아빠는 그런 공부법을 알려주시지는 못했다. 좋은 학원, 좋은 과외를 찾아주시지는 못했지만 아빠만의 최선을 다하셨다.
재수는 절대 안 된다고 하셨다. 두세 살 차이 나는 남동생들이 주르륵 있었다. 딸이 재수로 한 해를 쉬었다간 동생들 마저 지체가 되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아빠가 감당하셔야 하는 등록비의 무게가 너무 크다 하셨다. 물론 다시 한 해를 공부에만 집중하기엔 내게 남은 에너지가 없기도 했다. 그렇게 대학에 갔다.
꾹꾹 눌러쓴 아빠의 마음에 온몸으로 보답을 드리고 싶었다. 새 하얀 규격봉투, 그 속에 든 새하얀 편지지. 뜯지도 읽지도 못했다는 것을 아빠는 모르시겠지. 그러고 보니 답장 한 번을 못 했네. 그러나 딸은 고3 시절, 열심히 공부함으로써 답장을 대신했다. 아빠의 편지 덕분에 힘겨운 고3 생활을 버틸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