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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전모드 Nov 14. 2024

제6장

부모와 가족의 시선

나는 2남 1녀 중 장남이다. 동생들과는 각각 3살 차이가 나고, 부모님,친인척들의 기대와 책임을 가장 많이 느끼며 자라왔다. 그로인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바르게 살려고 노력했던것 같다.

나의 아버지는 다섯 누나들 아래에 누나들과의 나이차가 커서 거의 홀로 자란 막내아들이었고, 4대 독자로서 집안의 희망을 한 몸에 받으셨다. 

결혼 후 아버지는 사우디, 이라크 등지에서 해외 노동자로 주로 생활하며 가족을 부양하셨다. 

하지만 긴 타향살이의 여파 때문인지, 한국으로 돌아온 아버지에게 가정은 점차 낯선 공간이 되어 갔고, 화목한 가정을 꾸리는 일에는 늘 어색함이 묻어 있었다.

나는 그와는 다르게 안정적인 가정을 꾸리고 싶었다. 

아이들과 웃음이 가득한, 행복한 집을 꿈꿨다. 결혼 전에는 전처가 그런 가족 속에서 자란 줄 알았다. 

그러나 결혼 후, 그녀의 집안도 우리 집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보여지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배운 순간이었다. 

지금 돌아보면, 결혼 전 상대의 집안 화목도를 살피는 것도 중요한 기준이 되었어야 했다는 생각이 든다.

24.11.13 직접 그려 아이들에게 보낸 글그림

가족 중 나의 이혼을 가장 아파한 사람은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아들이자 가장인 내가 홀로 두 아이를 양육하는 모습을 보며 늘 염려하셨다. 

"밥은 먹었니?" 

"아이들 아침 챙기느라 고생이 많구나." 

"회사는 괜찮은 거니?" 

"술은 조금만 마셔라." 

어머니의 따뜻한 말들이 늘 나를 감싸줬지만, 결국 어머니는 심한 우울감을 겪게 되셨다. 

약을 복용하기 시작하셨고, 식사조차 거부하셨다. 

대화를 피하며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신 어머니를 지켜보는 일이 나와 형제들에게는 큰 고통이었다.

이혼의 충격은 아버지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젊은 시절의 무절제한 생활로 건강을 잃고 50대에 뇌출혈로 쓰러지신 아버지는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아왔는데, 나의 이혼 소식이 어머니에게 큰 충격을 준 것이 분명했다. 

형제들은 아버지를 요양원에 모시기로 결정하고, 나는 아이들을 돌보면서 어머니를 모시고 틈틈이 여행을 다니며 조금씩 그 마음의 짐을 덜어드리고자 했다. 

모자(母子) 단둘이 떠난 바다,산행까지, 우리는 함께 시간을 보내며 대화를 나눴고, 조금씩 안정을 찾아갔다. 몇 달이 흐르고 어머니는 다시 조금씩 웃음을 되찾으셨고, 형제들이 생활비를 지원하여 부모님은 함께 생활하시게 되었다.


이렇게 가까운 가족과의 관계에서 어려움과 변화가 일어날 때마다, "있을 때 잘해라"는 말이 떠올랐다. 

전처에게도 '있을 때 잘해줘야지'라고 생각하며 오히려 방치하게 되었던 것 같다. 

부모님을 보면서 배우듯, 아이들에게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지원을 물심양면으로 아낌없이 주려 한다. 

하지만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단호하게 다가서기도 한다.


나 또한 책을 통해 동기 부여, 행동력, 심리학에 대해 공부하며, 나 자신을 돌보고 이해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그런 과정을 통해 나 자신뿐만 아니라 아이들에게도 더 부드럽게 말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시간이 흐르며 집안에 웃음소리가 다시 퍼지고 있다.

고등학교 1학년인 큰아이는 학원이나 과외 없이도 매 시험마다 성적이 한 단계씩 오르고 있다. 

중학교 1학년인 둘째는 타지에서의 힘든 체육학교 생활을 마무리하고 집 근처 학교로 전학을 왔다. 

둘째 아이가 새로운 꿈을 찾을 수 있도록 힘껏 지원할 생각이다.


이렇게 나는 부모로서, 그리고 가족의 일원으로서 작은 변화와 노력들을 통해 삶을 다잡아가고 있다.

직접한 김치찌게 저녁식사, 내가 봐도 좀, 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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