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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트형님 Jun 15. 2024

번아웃(일지도 모르는 것)에 대한 고찰

서울시 성동구 김경자 원조 손칼국수 보쌈

최근에 심한 무기력증 내지 번아웃을 경험한 것 같다.

'같다'라는 접미사를 붙인 이유는 진짜로 경험한 게 맞는지 아닌지 확실하지 않아서다.

체온이나 키트로 판단할 수 있는 감기나 코로나와 달리 이 경험은 굉장히 새롭고 주관적인 영역이어서

생전 처음 느껴보는 이 기분을 뭐라고 정의해야 할지 어려워 한참을 헤매고 있다.


확실한 건 술을 처음 마시기 시작한 시절 숙취를 처음 경험했을 때와 굉장히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술을 마셔본 사람이라면 일정 기간 본인의 주량을 가늠을 못해 헤매는 경험을 하기 마련이다.

나도 분수에 맞지 않은 양의 술을 미련하게 마시고 숙취란 것을 처음 경험했을 때, 머리가 지끈거리고 속이 굉장히 쓰리고 아픈 게 이게 뭔가 하고 당황했던 기억이 있는데, 그게 숙취라는 것을 알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시간이 지나서 어느덧 반주를 즐겨하는 아저씨가 되었고, 숙취의 강도에 따라 대충 무엇을 먹어야 할지 알 정도가 되었다.


- 맥주로 인한 약한 숙취는 작은 진라면 컵라면이면 된다.  

- 조금 숙취가 심하다 느껴지면 닭곰탕이 제격이다. (동네 마트에서 유통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양반 닭곰탕을 할인 판매해서 열심히 쟁여두었다.)

- 어떨 때는 느끼한 음식이 도움이 되기도 한다. 피자 한판을 주문해서 한두 조각을 먹거나 빅맥 세트를 주문해 버거와 감자튀김을 먹은 후 콜라를 마신다. (콜라는 마지막까지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아야 효용이 극대화된다.)

- 술을 섞어 마셨을 때는 답도 없다. 많은 수면이 답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요즘의 감정은 딱 처음 숙취를 경험했을 때의 그것과 매우 유사하다는 것을 느꼈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시점에서 처음 겪어본 번아웃(일지도 모르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어떻게 벗어나야 할지 도무지 감이 안 잡힌다. 그저 아무것도 안 하고 싶고, 아무렇지도 않고 싶은 욕구가 날 무기력하게 만들고, 막상 아무것도 안 할 때는 불안하다. 입맛도 없는 게 당연지사. 삼시 세끼를 거르지 않는 것을 철칙으로 삼았었는데, 끼니를 거르게 되고 애써 챙기는 끼니도 라면이나 편의점 음식으로 대충 때우게 된다.


이렇게 무기력한 때에도 사람을 식탁으로 이끄는 음식을 Comfort food (대충 직역하면 위로가 되는 음식)라고 한다. 물론 내게도 어머니의 김치볶음밥처럼 다양한 comfort food가 있지만 숙취의 정도에 따라 다른 음식을 찾게 되고 섞어 마신 다음날에는 답도 없듯, 이 정도의 무기력증을 도와줄 comfort food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숙취와 무기력증의 가장 큰 차이점은 숙취는 많이 자면 해소가 되었지만, 이 무기력함은 자도 자도 해결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자도 피로가 가시지 않았고 오히려 죄책감만 쌓였다. 자취집에는 빈 라면봉투와 캔 통조림이 쌓여가고 있었다.


그러던 찰나 금남시장에 방문하게 되었다. 부모님이 응봉동 쪽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는데, 금남시장은 언덕을 넘어서 어느 정도 걸어가다 보면 나오는 꽤 작은 시장이었다. 아담한 시장 골목 구석에 위치한 작은 노포가 있는데, 이름은 '김경자 원조 손칼국수 보쌈'이라는 곳이다.


메뉴는 상당히 단순하다. 보쌈과 저렴한 칼국수-칼제비- 만둣국, 그리고 다양한 비빔밥까지.

보쌈을 제외하면 요즘 물가를 생각하면 매우 너그러운 가격이다.

부모님과 셋이서 칼제비를 두 개 시키고 보쌈을 중자로 시켰다.

이곳의 장점은 보쌈을 시키면 식사 메뉴를 소분해서 나눠주는 것이다.

별 것 아닐 수도 있지만 보기 드문 좋은 서비스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3그릇으로 소분이 된 칼제비 2인분이 나왔다.

칼국수도 좋고 수제비도 좋지만 제일 좋은 건 수제비와 칼국수의 식감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칼제비다.

칼제비 1인분 5,000원

제멋대로 모양을 한 수제비와 통통한 칼국수 면을 함께 즐기는 건 큰 호사다.

이곳의 칼제비는 바지락과 같은 별다른 식재료 없이 시원한 육수와 김가루, 부추가 들어가 있는 특별할 것이 없는 구성의 요리이다.

다만 특별할 것이 없는 게 특별한 요즘 물가에 고마울 따름인 5000원 칼제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함께 나온 김치와 구비되어 있는 고추 다진 양념을 넣고 이리저리 칼제비를 즐긴다. 전혀 부담스럽지 않고 오히려 기분이 좋은 밀가루 맛과 섞이는 시원하고 진한 육수향이 인상적이다.


칼제비를 나오고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보쌈이 나온다.

보쌈 (중) 40,000원

약 스무 점에 4만 원이면 양이 다소 아쉽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는 구성이다.

하지만 훌륭하게 삶아진 보쌈 한점 한 점을 먹을수록 가성비에 대한 아쉬움이 곧 사라진다. (사실 가성비는 아무래도 칼제비를 먹으며 충분히 챙겼다.)

사진에서 볼 수 있듯 훌륭한 수율의 보쌈은 함께 나온 쌈 거리와 함께 즐길 때 빛이 난다.

단순히 새우젓만 찍어도 기분 좋은 돼지냄새의 풍미를 한껏 살릴 수 있다.

돼지고기 특유의 쿰쿰함을 잘 살려주는 기분 좋은 조합이다.


주연인 보쌈 자체로도 훌륭하고 다양한 조연들이 있어 구성만으로도 벌써 군침이 돈다.

김경자 원조 손칼국수 보쌈의 가장 훌륭한 조연은 단연 보쌈김치이다.

수북이 쌓인 무생채 아래 김치가 깔려있는데, 새콤 달콤 매콤한 맛이 균형이 훌륭하게 잡혀있다.

남은 건 창의성의 영역이다. 다양한 쌈 거리와 보쌈을 이렇게 저렇게 즐겨본다.

그 과정에서 다양한 풍미와 맛과 식감을 함께 즐기는 것은 아주 바람직한 일이다.

어떤 구성이 가장 나은 구성일지 정답이 없다는 것은 재미를 더욱 배가한다.

당장 정답이 없는 일을 하며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는데, 아이러니한 일이다.

아무쪼록 훌륭한 음식으로 배부르게 식사를 마치고 어느 정도의 마음의 위안을 얻으며 자리를 나섰다.

입맛이 도무지 없던 차에 모처럼 반가운 음식.


이 끼니로 번아웃인지 뭔지 모르겠는 이것을 떨쳐낼 수 있었다 하는 것은 비약이겠지만, 앞으로도 이 음식점을 맘의 위로를 얻고 싶을 때 이따금씩 찾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함께 얽히고설키며 살아가는 만큼 각자마다 이런저런 상황에 맞춰 그때그때 찾는 comfort가 있을 것이다.


나 같은 경우, 퇴근을 하고 나면 당장의 도파민을 위해 온갖 자극적인 인스턴트/배달 음식과 쇼츠와 같은 콘텐츠를 소비했었는데, 오히려 자극적이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솔직하고 투박한 것들이 지친 몸과 맘에 훨씬 도움이 된다는 것을 체감한다.


5월이 꺾이면서 볕이 제법 뜨거워졌다. 부모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응봉동을 향해 털레털레 작은 언덕을 넘었다. 별 특별한 게 없어 특별했던 기분 좋은 시간. 이런 감사함에 집중하다 보면 별안간 날 괴롭히는 무기력에서 멀어질 수 있겠다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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