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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트형님 Aug 13. 2024

간절함에 대한 고찰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뚝방길생두루치기

최근 2개월 동안 김치찌개나 김칫국을 의식적으로 피했다.


간절한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약 2년 동안 계약직으로 근무했었던 곳에서 정규직 자리가 나온 것이다.

내 계약이 더 길었다면 바로 전환이 되었겠지만, 2년 내내 기다렸던 이 자리는 하필 계약이 만료되자마자 확정이 되어서 처음부터 끝까지 채용절차를 거쳐야 했다. 간절히 여기는 기회는 닿을 듯 말 듯 늘 참 얄밉다.


채용 공고와 면접을 기다리면서 지난 2년 남짓한 시간 동안 경험한 것을 정리해보기도 하고, 나름 면접 컨설팅을 받기도 하고 지냈더랬다. 분명 핑계지만, 사실 브런치 계정을 만들고 나서 꼴랑 글 두 개를 올리고 아무것도 안 한 것도, 채용절차에 최대한 집중하고자 한 것이었다. (사실할 것들은 거의 다 했다.)


생각보다 채용 과정은 지지부진했고, 나름 피 말렸던 2개월을 지내던 최근에 자리를 다시 없애기로 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내가 계약직으로 근무했던 곳은 코시국에 나름 내로라하는 국내 중견기업에서 어렵사리 얻은 정규직 자리를 포기할 만큼 학생 때부터 선망했던 기업이었고, 2년 동안 너무나 원했던 정규직 자리였다.  

물론 아무도 정규직을 보장해주진 않았지만, 혹여 있지도 모를 기회를 위해 열심히 일했다.

정말 의미 있는 경험을 하고, 많은 것을 배운 시간이었다.


동시에 간절했던 만큼 나의 실수가, 뜻하지 않게 어그러지는 프로젝트가, 상사가 나에게 주던 부정적인 피드백이 내 정규직 전환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매번 일희일비하고, 노심초사하고, 조마조마했던 시간이기도 했다.


계약이 끝나기 전 마지막 팀 콜에서, 돌연 은퇴를 선언했던 디렉터가 은퇴 전 나를 위한 정규직 자리를 마련해 주겠다고 거듭 돌연 공언했을 때, 그간의 맘고생이 보상을 받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어이없게도 문득 김치찌개를 먹지 않겠다는 다짐을 했다.


어렵사리 얻은 기회를 어떻게든 지키고 싶어서였다.


사람들은 기본적인 욕구인 식욕을 절제함으로써 자신의 간절함이나 의지 혹은 신념을 표출한다.

광야에서 40일 동안 단식을 했던 예수나, 라마단 기간의 무슬림이나, 하라는 일은 안 하고 머리를 깎고 단식 투쟁을 하는 정치인들이 그렇다.


나도 무슬림이나 정치인처럼 (차마 예수처럼이라고 말은 못 하겠다.) 나의 간절함을 나 자신에게 다시 각인시키고 이 기회가 혹여 목전에서 달아나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 아주 소수의 지인들에게 김치찌개 단식 소식을 알린 뒤 김치찌개와 거리를 두었다.


김칫국 내지 김치찌개는 '김칫국부터 마신다'는 속담과 깊은 관계가 있으며, 이 속담은 '해 줄 사람은 생각지도 않는데 미리부터 다 된 일로 알고 행동한다는 말'을 의미로 표준국어대사전에 등재되어 있는 만큼, 나에게 너무나도 간절한 기회에 치명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위험한 음식이기 때문이었다. 김치찌개가 내 최애 음식은 아니지만, 푹익은 김치에 돼지비계는 언제든 뿌리치기 어려운 조합이 아닌가.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2개월 뒤 정규직 자리는 포기하는 것이 좋겠다는 통보를 받았다.

계약직, 을로 산 것이 버릇이 된 건지 성의 없는 방식에도 태연히 알겠다는 답변을 남겼지만, 그동안 태웠던 애간장과 말렸던 피가 불 끄는 것을 잊어 태워먹은 김치찌개의 김치처럼 내 속에 눌어붙었던 것 같은 기분이 몰려들었다. (언제 한번 국을 태워먹은 적이 있는데, 냄새나 뒤처리나 유쾌한 경험은 결코 아니었다.)


부정적인 기분에 압도되는 것은 결코 유쾌하지 못하다.


통보를 받고 도저히 혼자서 있기가 어려워서 오랜 친구를 불러서 동네에서 밥을 같이 먹었는데, 별생각 없이 김치전골을 시켰다.


"우와"


첫 입에 돌연 눈이 크게 떠졌다. 김치국물의 특유의 신맛과 단맛을 굉장히 오랜만에 맛보는 기분은 논산훈련소에서 수료하고 나서 몇 주간 못 피운 담배를 아버지의 주머니에서 꺼내 몰래 피웠을 때의 그 기분과 상당 부분 흡사했다.   


그리고 어이없게도 문득 의도적으로 정말 제대로 된 김치찌개가 먹고 싶었다.

그러자 내 기준 한국에서 제일 맛있는 김치찌개를 취급하는 '뚝방길 생두루치기'가 간절해졌다.

(아무래도 이래 되든 저래 되든 간절해하는 대상은 늘 존재하고 바뀌는가 보다.)

  


나는 어렸을 때 고양시 덕양구에 있는 행신동에서 자랐는데,


뚝방길생두루치기는 누구를 만나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전국구' 김치찌개 맛집이다.


쌀뜨물을 베이스로 한 국물에 칼칼한 고춧가루와 맛있는 김치, 넉넉한 돼지고기가 어우러진 아주 합리적인 가격의 김치전골을 취급하는 뚝방길생두루치기는 내가 행신동을 그리워하는 이유 중 하나다. 현재 행신역 앞 거리는 내가 어렸을 때와 비교하면 마천루 투성이가 되었는데, 이 뚝방길생두루치기는 마천루 옆 다소 허름한 건물 1층에 태연하게, 아주 오래 자리 잡고 있다. (사진은 3년 전임을 참고해 주시길 바란다.)



1년에 아주 오랜 친구들을 보러 한두 번 행신동을 방문하는 것을 제외하면 갈 기회가 없고, 늘 김치찌개를 먹는 것이 아니다 보니 어느덧 먹은 지가 3년이나 지나있었다. 그곳의 김치찌개는 매우 탁월하고 훌륭한 것으로 기억하는데, 과거는 미화되기 마련이기 때문에 내가 2021년에 관련해서 남긴 인스타그램 후기 피드를 참고해서 설명하자면,

이모님께서는 김치찌개를 5분을 더 익히라고 하신다. 찌개 안에 가득 들어있는 양파와 파는 국물을 한층 개운하게 만들며, 김치는 찌개로 먹기에 제격이다. 김치는 김치찌개에 풍부한 신맛과 짠맛을 부여하는데, 다른 김치찌개와 비교하면 다소 맵긴 하다.
As soon as you get the stew, they tell you to heat it for five more minutes for the stew to boil down. The abundant onions and spring onions in the stew make it refreshing. Also, the kimchi is just right to eat. Kimchi gives a sour and salty taste to the stew. Compared to kimchi stew in the other places, it is a bit spicier in a pleasant sense.

두루치기의 가장 큰 매력은 고기이다. 뚝방길생두루치기는 취급하고 있는 싱싱한 생앞다리살에 큰 자부심을 느끼고 있는데, 생고기와 비계의 비율이 매우 인상적이다. 비계 또한 국물에 풍미를 더한다.
The best part of the duruchigi is the meat. They are proud of the fresh meat they use for the dish. The part they use is the foreleg of a pig. The pork has the right proportion of fat and lean meat. The fat in the pork adds richness to the stew.


앞서 말한 것 말고도, 라면, 떡, 두부 그리고 고기를 추가할 수 있다. 나는 떡과 라면, 그리고 돼지고기를 추가했다. 그리고 새우젓으로 간을 한 계란찜을 아주 합리적인 가격에 즐길 수 있었다. 뚝방길생두루치기에서 이 모든 것과 함께 훌륭한 식사와 친구들과의 시간을 즐길 수 있었다.    
Other than all these, you can add various toppings such as ramyeon, rice cakes, tofu, and additional pork. I added rice cake, ramyeon and pork. In addition, they have a decent steamed egg seasoned with salted shrimp at an extremely reasonable price. Putting them all together completed the meal and the quality time with dear friends.


KTX의 종착역 (그렇다.)인 행신을 방문하게 된다면, 뚝방길생두루치기를 들려서 진또배기 김치찌개를 즐겨보시길. 결코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If you happen to stop by Haengsin, the last stop of KTX, the bullet train of Korea, stop by the place and experience legitimate kimchi stew/duruchigi. It won't fail you at all


나도 많은 억울함을 느끼지만, 김치찌개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김치찌개도 참 억울할 것 같다.


사실 김치찌개도, 나도 잘못이 없다. 기회가 된다면 김치찌개에게 사과를 하고 싶다.


"산다는 건 그런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면 앞으로 김치찌개 속 두부 같은 내가 이 험하고, 불친절한 세상을 어찌 살아야 하나 싶어 너무 막막하고 숨이 턱 막힌다. 최근에 고민 끝에 정신과를 방문했고, 하라는 일은 안 하고 단식 투쟁을 일삼는 어느 정치인과 인상이 비슷한 의사분은 내 이야기를 듣더니 항우울제와 항불안제를 10일 치 처방해 주었다.


어서 내 컬러링처럼 삶은 두렵기는 해도 설레는 일이라는 걸 다시 체감하고 기력을 찾았으면 좋겠다. 나에게 전화를 해서 여행스케치의 '산다는 건 그런 게 아니겠니'를 듣다 평소보다 의기소침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을 나에게 따뜻한 몇 마디를 건네주고 싶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어느 순간부터 나 자신에게 따뜻한 말을 건네주는 것은 계약직에서 정규직으로 전환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 되었다. 때문에 나의 우울을 받아주고 있는 주변인들에게 불필요한 책임을 전가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마음이 무겁고 미안하다.


아무쪼록 분명 훌륭한 김치찌개는 도움이 될 것이다.


내 우울을 인내심 있게 감내해주고 있는 여자친구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흔쾌히 광복절에 행신동으로 가자고 했다. 신난 마음으로 뚝방길생두루치기에 전화를 해서 광복절에도 영업을 하는지 물어봤다.


"당연하죠."


전혀 당연하지 않다. 감사한 일이다.


많은 것이 맘처럼 안 되는 와중에 먹고 싶은 곳에서 먹고 싶은 걸 먹을 수 있는 건 큰 축복이자 호사라고 생각한다. 시기가 시기인 만큼, 지자체에서 뒤집을 가치도 못 느끼는 어느 후미진 골목에 깔린 보도블록 사이에 뜬금없이 자라는 이끼처럼 생기는 이 작은 감사함이라는 감정에 집중하는 게 아주 중요한 것 같다.


글을 마치려던 찰나, 전에 근무했었던 곳에서 사수였던 분한테 전화가 왔다. 신기한 일이다. 일주일 만에 자초지종을 들을 수 있었다. 지난 2개월 사이 이런저런 변수가 생겼고, 자칫 희망고문을 하는 모양새가 되어버려 애써 포기하라고 말해준 것이라고 생각하면 나름의 배려라고 볼 수도 있겠다. 정말 아닌가 보다라는 생각에 잠겨있었는데, 사수가 목소리가 안 좋다며 괜찮냐고 물어보시길래, 괜찮다고, 하루종일 말을 안 해서 목이 잠겼다고 둘러댔다. 사실 괜찮지 않다.   


전화를 끊고 밖을 보니 비가 몰아치고 있다.

2024년 여름에 내리는 비는 매번 예사롭지 않다.

나올 때만 해도 우산을 들고 나올 생각을 할 수 없는 날씨였기 때문에 우산을 챙기지 않았다.

카페에 영락없이 갇힌 셈이다.


창문을 활짝 열고 나왔는데..

물범벅이 될 나의 자취방과 나와 같이 영문을 알리 없는 민트가 생각난다.

나와 달리 민트는 초연해하겠지만~


미처 우산을 챙기지 못한 사람들이 부랴부랴 카페로 들어온다.


산다는 건 그런 게 아니겠니,

여행스케치의 노래를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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