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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트형님 Sep 24. 2024

결정에 대한 고찰

서울시 동대문구 고향집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10대에 한국의 신안군 어느 섬격인 미국 어느 깡촌에서 유학생활을 했다.


그러고는 또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20대 중후반에 들어서 서울에 살게 되었다.


시골쥐가 서울쥐가 된 셈이다.


오래된 친구 여럿은 아직 그 시골에 있다.


시골쥐 친구들은 한국에 오면 소곱창이나, 족발과 같은 해외에서 먹기 힘든 한국음식을 찾는다.

맛집을 엄선하고, 그들이 그리워하던 음식을 앞에 두고 내내 이런저런 이야기를 곧잘 하게 되는데, 전혀 지겨울 게 없는 시간이다.


언젠가 왜 이곳은 편하면서 편하지 못한가에 대한 이야기와 우리의 삶은 왜 안녕하기 어려운지에 관해 그들이 그리워하던 족발을 앞에 두고 이야기를 했다.


서울쥐와 시골쥐 사이에서 여러 가설이 오갔는데,

맥주 몇 잔을 연거푸 마시자 돌고 돈 이야기는 뜬금없이 신분제로 향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역사시대를 돌이켜보면 신분은 늘 우리와 함께 했다. 농경을 시작하고 자원을 축적하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레 신분 체계가 자리 잡게 되었다(고 알고있다). 그리고 신분은 사라진 지 오래되지 않았다.

우리나라만 보면, 1800년대 후반 갑오개혁-광무개혁으로 이어지는 개혁(비스무리했던 것)을 통해 명목적인 신분제가 폐지되었다.


술자리에서 뱉은 개똥철학이라 이걸 읽으라고 정리하는 것도 민망하지만, 요지는 적어도 신분제가 있었던 시대에는 팔자가 나름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결정거리가 적었고, 따라서 고민거리가 적었다는 것이다. 신분 이동의 기회가 적은 사회에서, 개개인은 아마 본인이 실제로 뭐든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 별생각 없이 그렇게 태어났으니 그렇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 터다.


반면, 명목적으로는 신분이 사라진 현시대에는 운이든 노력이든 하기 나름인 세상이기 때문에, 즉 '뭐든 될 수 있'다는 것을 이론적으로는 인지하고 있기 때문에 변수가 훨씬 많다. 뚜렷한 정답이 없는 상황에서 개인이 끊임없이 결정을 내려야 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온전히 져야 하는 자유인의 삶이 마냥 좋은 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수많은 성공한 사람들의 자기 개발서와 지고한 위인들의 철학서적, 다소 편향된 알고리즘이 큐레이션 해주는 컨텐츠들이 나름의 길라잡이가 돼주긴 하지만 말이다.


더군다나 아이러니하게도, 과거 선인들의 수많은 노력과 고민으로 겨우 신분제를 폐지했음에도, 우리는 다시 신분제로 회귀하고 싶어 하는 듯하다. 그게 경제적이든, 사회적이든, MBTI든 서로를 계속 구분하고 나누고 비교한다.


아무래도 그게 편리하기 때문이겠지. 편안하진 않더라도 말이다. 사람들은 자유를 갈망하지만, 동시에 이를 위해 책임을 지거나 희생을 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통제를 혐오하지만, 통제가 주는 안락함이나 책임전가의 기회는 너무 달달하다.


렇다고 신분이라는 부레를 잃은 시대에서 아무것도 안 할 수도 없다. 상어처럼 끊임없이 계속 움직여야 뭐라도 될 수 있다. 아무것도 안 한다면 어디까지 가라앉을지 모른다.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는 것도 결정이며, 그에 따른 책임과 희생을 치르게 되는 것이다.


어찌 보면 신분은 축복이자 저주인셈이다. 동시에 뭐든 될 수 있다는 건 매우 감사한 축복이자 매우 무서운 저주이기도 하다.


그러던 차에, 또다시 돌연 인생이 순댓국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정말 순댓국을 사랑한다. 순댓국은 정말 매력적인 음식인데, 같은 식당에서 순댓국을 먹어도, 새우젓, 깍두기 국물, 다진 양념 등 그날의 기분이나 기호대로 커스터마이징을 하기 때문에 늘 다른 순댓국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날의 순댓국에 대한 책임은 응당 자신이 져야 하기 때문에, 만원 한 장으로 인생을 경험할 수 있는 것 중 순댓국만 한 게 없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런 의미에서, 내 순댓국 루틴은 아래와 같다.


1. 펄펄 끓는 순댓국이 나오면, 바로 밥 반 공기를 만다. 그리고 부추나 들깨가루를 훌훌 넣는다.

2. 밥공기 뚜껑 위에 고기를 한참 쌓아둔 후, 김치, 양파, 새우젓 등과 함께 즐긴다. (순대는 뜨겁기 때문에 맨 나중으로 미룬다.)

3. 고기를 3/4 즈음 먹고 나면, 어느 정도 식은 국물에 간을 하는데, 새우젓 그리고 깍두기 국물로 간을 한다. 종종 순대중 하나를 부셔 넣기도 한다. (깍두기 국물은 순댓국 국물을 감칠맛 나게 해 준다.)

4. 순댓국 간이 마음에 들면, 앞서 넣었던 밥을 김치, 깍두기, 고기등과 함께 즐긴다. 밥이 국물을 머금고 있어 식감이 퍽 근사하다.

5. 밥을 얼추 다 먹으면, 이번엔 다진 양념을 넣고, 나머지 반공기를 털어 넣는다. 나머지 반공기는 뚜껑이 열린 채로 관심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살짝 건조해져 있을 것이다. 라면에 찬밥을 넣는 것과 같은 효과를 즐길 수 있다.

6. 남은 고기, 순대와 함께 순댓국 뚝배기 바닥이 보일 때까지 먹는다.     

7. 식사를 마친 후 만족스럽게 밖으로 향한다.


일련의 생각을 하고 나니 순댓국이 간절해졌다.

알고 보니 서울 3대 순댓국 중 하나라는 곳이 동네에 있었다. 이런 우연이 다 있나.

서둘러 청량리의 '고향집'으로 향했다.

코는 나가서 풀어야 한다.


코를 얼마나 풀길래 저런 설명이 있는 것인가. 생각에 잠겨 입구에 쭈뼛쭈뼛 서있다 보니 이모님께서 구석에 1인석으로 안내해 주셨다. 

순댓국 보통 9,000원 (2024년 5월 기준)

주문을 하고 얼마 있지 않아 순댓국이 나왔다. 큼지막한 깍두기, 배추김치, 그리고 청양고추와 새우젓이 포함된 나무랄 데가 없는 구성.

보통임에도 고기가 원 없이 들어가 있다. 특이었으면 국물보다 고기가 많지 않았을까. 입에서 탄성이 나왔다.


이 집은 무엇보다 다진 양념이 매우 특출났는데, 미처 사진을 찍는 것을 잊고 바로 뚝배기를 비울 정도였다. 내 루틴을 따라본다면 5번(밥을 얼추 다 먹으면, 이번엔 다진 양념을 넣고, 나머지 반공기를 털어 넣는다.)을 꼭 넘기지 마시길.

 

한참 벽을 보며 위에 적은 루틴 1부터 6을 완료하고 나서 뒤를 돌아보니 산업화 세대와 베이비 부머, X세대, 어디선가 소문을 듣고 찾아온 MZ까지 잘 어우러져 있다. 이 집을 나서면 보기 어려운 아름다운 모습이다.

7번(식사를 마친 후 만족스럽게 밖으로 향한다.)까지 마저 마치며 더할 나위가 없는 의사결정을 했다는 생각을 하며 나왔다.

행복한 식사.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와 함께 다시 들린 고향집.

꼭 코는 나가서 풀어야 한다.


함께 반주를 할 수 있는 아버지를 둔 것은 큰 축복이다.

앞선 방문에서 혼자 가서 시키지 못한 순대정식을 시켰는데, 아름답고 기깔난 비주얼에 기선제압을 당했다.

순대와 머리 고기, 간, 허파 등이 아름답게 플레이팅 된 비주얼적으로도 매우 훌륭한 요리다.

순대정식 12,000원 (2024년 5월 기준) 순대나 고기가 들어가지 않은 순댓국물이 포함되어있음.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흡족한 안주.

결정에 대한 이야기를 대놓고 하진 못했지만, 우회적으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아버지도 아는지 모르는지 우회적으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셨다. 아버지는 30년 내내 내가 안녕하길 바랄 뿐이다. 내내 청하를 주고받았다. 감사한 일이다.  

역시나 손에 꼽는 좋은 결정이라는 생각과 함께 다시 7을 반복했다.


쓰다 보니 이야기가 너무 많이 돌고 돌았다.

아무쪼록 많은 것이 편리해졌지만 편안하지 않은 것은 어쩌면 너무 많은 자유와 선택이 주어진 것이 원인 중 하나가 아닐 것이라는 말을 했더랬다.


주제넘게 너무 많이 알고 보는 것은 유쾌한 일은 아니다.


안 그래도 사촌이 땅만사도 배가 아프다는 사람들이 가득한 대한민국이다. 더군다나 인터넷이나 SNS를 통해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의 경사를 끊임없이 목격하다 보면, 비교라는, 결국 지는 게임을 하게 되니 다들 잔변감 같은 찝찝함이 떠나지 않는 것 같다.


그렇게 힘들면 1800년대 후반에 다시 태어나겠냐고 누군가 물어보면 그건 또 아니다.

다행히 아직은 어디든 한 시간만 일하면 (2024년 기준 최저임금은 9,860원이다.) 고향집의 순댓국 보통을 먹을 수 있는데, 왜 굳이 돌아가겠는가.

단지 요 근래 여러 크고 작은 고민과 결정을 했어야 해서 주저리 써놓은 하소연일 뿐이다.


이에 반해 내 지혜로운 고양이 민트는 고민이 없다.

밥을 남기든, 밥을 너무 많이 먹어서 토를 하든, 무엇을 하든 후회가 없고 초연하다.

민트처럼 아무렇지 않으면 소원이 없겠다.


하지만 고양이보다는 쥐에 더 가까운 사람이기 때문에 아무렇지 않을 수가 없다.

그저 고향집에서 그랬던 것 처럼 이런저런 선택을 내릴 때마다 만족을 하고 최대한 긍정을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 외에는 도저히 방도가 없다.


도저히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긴 여름이 추석이 지나고 하루종일 비가 내린 뒤에야 겨우 끝이 났다. 무엇보다 드디어 선선한 바람이 불어온다.

서울쥐로 사는 것 중 가장 좋은 건 이런 멋진 야경을 쉽게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다 후련하다. 어서 이 후련함을 일상에서도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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