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10대에 한국의 신안군 어느 섬격인 미국 어느 깡촌에서 유학생활을 했다.
그러고는 또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20대 중후반에 들어서 서울에 살게 되었다.
시골쥐가 서울쥐가 된 셈이다.
오래된 친구 여럿은 아직 그 시골에 있다.
시골쥐 친구들은 한국에 오면 소곱창이나, 족발과 같은 해외에서 먹기 힘든 한국음식을 찾는다.
맛집을 엄선하고, 그들이 그리워하던 음식을 앞에 두고 내내 이런저런 이야기를 곧잘 하게 되는데, 전혀 지겨울 게 없는 시간이다.
언젠가 왜 이곳은 편하면서 편하지 못한가에 대한 이야기와 우리의 삶은 왜 안녕하기 어려운지에 관해 그들이 그리워하던 족발을 앞에 두고 이야기를 했다.
서울쥐와 시골쥐 사이에서 여러 가설이 오갔는데,
맥주 몇 잔을 연거푸 마시자 돌고 돈 이야기는 뜬금없이 신분제로 향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역사시대를 돌이켜보면 신분은 늘 우리와 함께 했다. 농경을 시작하고 자원을 축적하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레 신분 체계가 자리 잡게 되었다(고 알고있다). 그리고 신분은 사라진 지 오래되지 않았다.
우리나라만 보면, 1800년대 후반 갑오개혁-광무개혁으로 이어지는 개혁(비스무리했던 것)을 통해 명목적인 신분제가 폐지되었다.
술자리에서 뱉은 개똥철학이라 이걸 읽으라고 정리하는 것도 민망하지만, 요지는 적어도 신분제가 있었던 시대에는 팔자가 나름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결정거리가 적었고, 따라서 고민거리가 적었다는 것이다. 신분 이동의 기회가 적은 사회에서, 개개인은 아마 본인이 실제로 뭐든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 별생각 없이 그렇게 태어났으니 그렇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 터다.
반면, 명목적으로는 신분이 사라진 현시대에는 운이든 노력이든 하기 나름인 세상이기 때문에, 즉 '뭐든 될 수 있'다는 것을 이론적으로는 인지하고 있기 때문에 변수가 훨씬 많다. 뚜렷한 정답이 없는 상황에서 개인이 끊임없이 결정을 내려야 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온전히 져야 하는 자유인의 삶이 마냥 좋은 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수많은 성공한 사람들의 자기 개발서와 지고한 위인들의 철학서적, 다소 편향된 알고리즘이 큐레이션 해주는 컨텐츠들이 나름의 길라잡이가 돼주긴 하지만 말이다.
더군다나 아이러니하게도, 과거 선인들의 수많은 노력과 고민으로 겨우 신분제를 폐지했음에도, 우리는 다시 신분제로 회귀하고 싶어 하는 듯하다. 그게 경제적이든, 사회적이든, MBTI든 서로를 계속 구분하고 나누고 비교한다.
아무래도 그게 편리하기 때문이겠지. 편안하진 않더라도 말이다. 사람들은 자유를 갈망하지만, 동시에 이를 위해 책임을 지거나 희생을 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통제를 혐오하지만, 통제가 주는 안락함이나 책임전가의 기회는 너무 달달하다.
그렇다고 신분이라는 부레를 잃은 시대에서 아무것도 안 할 수도 없다. 상어처럼 끊임없이 계속 움직여야 뭐라도 될 수 있다. 아무것도 안 한다면어디까지 가라앉을지모른다.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는 것도 결정이며, 그에 따른 책임과 희생을 치르게 되는 것이다.
어찌 보면 신분은 축복이자 저주인셈이다. 동시에 뭐든 될 수 있다는 건 매우 감사한 축복이자 매우 무서운 저주이기도 하다.
그러던 차에, 또다시 돌연 인생이 순댓국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정말 순댓국을 사랑한다. 순댓국은 정말 매력적인 음식인데, 같은 식당에서 순댓국을 먹어도, 새우젓, 깍두기 국물, 다진 양념 등 그날의 기분이나 기호대로 커스터마이징을 하기 때문에 늘 다른 순댓국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날의 순댓국에 대한 책임은 응당 자신이 져야 하기 때문에, 만원 한 장으로 인생을 경험할 수 있는 것 중 순댓국만 한 게 없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런 의미에서, 내 순댓국 루틴은 아래와 같다.
1. 펄펄 끓는 순댓국이 나오면, 바로 밥 반 공기를 만다. 그리고 부추나 들깨가루를 훌훌 넣는다.
2. 밥공기 뚜껑 위에 고기를 한참 쌓아둔 후, 김치, 양파, 새우젓 등과 함께 즐긴다. (순대는 뜨겁기 때문에 맨 나중으로 미룬다.)
3. 고기를 3/4 즈음 먹고 나면, 어느 정도 식은 국물에 간을 하는데, 새우젓 그리고 깍두기 국물로 간을 한다. 종종 순대중 하나를 부셔 넣기도 한다. (깍두기 국물은 순댓국 국물을 감칠맛 나게 해 준다.)
4. 순댓국 간이 마음에 들면, 앞서 넣었던 밥을 김치, 깍두기, 고기등과 함께 즐긴다. 밥이 국물을 머금고 있어 식감이 퍽 근사하다.
5. 밥을 얼추 다 먹으면, 이번엔 다진 양념을 넣고, 나머지 반공기를 털어 넣는다. 나머지 반공기는 뚜껑이 열린 채로 관심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살짝 건조해져 있을 것이다. 라면에 찬밥을 넣는 것과 같은 효과를 즐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