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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트형님 Nov 03. 2024

고양이와 고래를 동경하며

나의 최선과 최고 사이에 있는 괴리에 대한 글

인간과 동물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너무나도 많겠지만, 그중 하나는 스스로와 서로를 인지하는 방식이다. 동물은 서열, 사냥 등 본능과 직결된 범주 내에서만 인지를 활용한다. 반면, 인간은 쓸데없이 얘는 이런 사람, 쟤는 저런 사람이라고 자신과 타인을 비교하며 수군거린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는 조금 식상해진 MBTI에 입각하자면 나라는 사람은 XNXX이다. (그렇다. 대문자 N이다.) 직관을 뜻하는 N 성향이 강한 사람은 곧잘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고 한다. 게다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설정까지 갖춰진다면, N으로서는 더할 나위가 없다. 물론 다양한 경험을 기반으로 현실에서 나름 '최선'의 의사결정을 하며 살고 있지만, 나의 최선은 늘 상상 속 최고와 거리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상상의 나래를 거두고 다시 현실로 돌아오면, 단물이 빠진 껌을 씹는듯한 감정이 밀려 들어온다. 오늘도 단물이 빠질 껌을 감수하고, 상상에 시동을 건다.


이제 갓 서른이 된 내게 무한한 자원이 주어진다면, 그럴싸한 가정을 꾸려야 하기에 우선 서울의 한적한 어느 동네에 거처를 ‘소유’하고 싶다. 그리고 동해안 어딘가 바다가 보이는 어느 인구 소멸 위험지역에 쉴 곳을 가지겠다. 아무래도 아파트든 빌라든 상관없지만 그 어떤 모기도 뚫지 못하는 근사한 방충망을 갖춘 창호가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마음에 쏙 드는 외관을 갖고 있지만 고장이 잦다고 소문난 레니게이드를 뽑고 대한민국을 구석구석 다니려 한다. 그 과정에서 레니게이드가 고장 난다면 실컷 고쳐버리겠다. 이렇듯, 필요한 것들에 더 나아가 현생에서 가지기 어려워 신 포도라 치부했던 여러 희망 사항을 하나둘씩 누릴 예정이다. 실컷 적고 보니 나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인가 보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원하는 건 심적 자원이다. (흔히들 멋쩍게 건네는 “힘내”라는 말에서 ‘힘’과 같은 것 말이다) 삶은 때때로 감히 예상하지도 못했던 상황을 집어던지곤 한다. 서울에 있는 자가도, 레니게이드도 어쩔 도리가 없는 상황을 겪을 때 (그것들조차 멋쩍게 "힘내"라는 말밖에 건네줄 수 없을 정도로), 희로애락은 느낄지언정 무너지지 않을 마음을 갖추고 싶다. 

민트 증명사진

그런 면에서 나의 고양이 민트는 놀랄 정도로 좋은 귀감이다. 민트는 일정한 양의 사료와 매일 치워지는 화장실만 있다면 최고의 삶을 살고 있다는 듯한 인상을 준다. 사료가 너무 짜다느니, 화장실 모래가 마음에 안 든다느니 그런 불평을 일절 하지 않는다. 다른 집사와 나를 비교하지도 않으니 이만한 친구가 없다. (민트가 SNS를 시작한다면 그만한 재앙이 없을 것이다. 어휴) 

민트 증명사진 2

집사로서 최고의 환경을 마련해주지 못해 종종 마음이 무겁지만, 나의 초라한 최선을 최고로 누릴 줄 아는 ‘여유’를 가진 존재가 민트다. 아무쪼록 민트처럼 여유, 즉 느긋하고 차분하게 생각하거나 행동하는 마음의 상태를 찾고 그것을 절대 잃고 싶지 않다. 충분한 여유가 있는 한, 38선 이북만 아니라면 내가 누구든, 어디서, 뭘, 왜 하든 아무래도 좋겠다는 생각이다.

2019년 알래스카에서 본 고래

이런 연유에서 종종 고래의 삶을 꿈꾼다. 다음 생엔 아주 큰 고래가 되려 한다. 이왕이면 꼬리가 꽤 멋진 놈으로 말이다. 고래는 사료나 화장실 같은 장치 없이도 아주 여유로워 보인다. 거대한 몸뚱이로 세계 여러 바다를 위아래로 훑고 나면, 물 밖에 인간들을 호들갑을 떨게 만드는 일들은 결국 별것 아녔음을 알게 되지 않을까? 자연이나 문명이 아니라면 아무도 함부로 건들지 못하는 고래의 삶은 상상만 해도 근사하다. 고래로서의 경험담을 세상에 알려주고 싶어 입이나 손이 근질거리는 게 조금은 불편하겠지만, 분명 충분한 여유가 있을 테니 금방 평온을 찾겠지.

살고 있는 빌라 옆 담벼락에 써진 글귀


돌아보니 내가 원하는 삶은 평범하면서도 평범하지 않다. 당장 서울에 자가 한 채, 동해안 어느 지역에 쉴 곳, 레니게이드만 해도 부채 없이는 내가 20년을 꼬박 일해도 가질까 말까 하는 것들이다. 그리고 심적인 여유는 또 어떤가. 20년은커녕 50년을 노력한다고 해도 어려워 보인다. 이런 결론에 닿으면 단물이 빠진 껌을 질겅질겅 씹는 기분이 엄습하며 더 나아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고양이와 고래의 삶이 마냥 부러울 따름이다. 그런 의미에서 덕이라도 많이 쌓고자 한다. 민트와 사랑하는 사람들을 본받고, 돌봐야겠다. 그리고 넉넉히 쌓아둔 덕으로 다음 생에는 기필코 고래로 태어나겠다. 그게 최선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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