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진 Apr 02. 2022

난 밥을 빨리 먹는 게 힘들다

흡입만이 살길.

무언가를 흡입하는 사람들이 신기했다. 똑같이 말하면서 먹어도, 넌 떠들어라 난 먹겠다 열심히 흡입을 해대도, 언제나 난 먹는 게 느렸다.

그나마 초등학생 때는 어땠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중학생 이후 내 점심시간은 항상 촉박, 급박, 긴급 등등 뭐든 급한 단어를 통튼 시간들이었다. 그래서였나. 대학생 때 동기들과 수업시간이 맞지 않는 이유로 혼자 먹을 때면 너무나 행복했다. 그 순간은 온전히 나만의 점심시간을 즐길 수 있었다. 다만 그것도 잠깐이었던 듯하다. 군대에서의 2년은 정말 지옥 같은 식사시간이었다. 왜 내 선임들은 다들 그렇게 허겁지겁 먹거나 조금 먹었을까. 난 강제로 양을 줄였다. 그렇게 해서라도 남들과 속도를 맞춰야 했고, 그렇게 해야 군생활을 견뎌낼 수 있었다.




지금 나이 30대 중반의 끝. 밥 먹는 시간으로 아직까지 스트레스를 받아야 하는 게 맞는 건가 싶다. 회사에서는 그러려니 한다. 단체생활이 그런 거니까. 하지만 집에서도? 심지어 아내랑 먹을 때도?


"애랑 있으면 점심, 저녁 하루 종일 허겁지겁 뭐 먹는지도 모르게 먹어. 넌 점심은 회사에서 먹으니까 눈치 보지 말고 천천히 먹고, 집에서라도 빨리 먹고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아내의 말에서 요지는 "회사에서라도 천천히 먹어라"일까, "넌 점심에라도 여유 있으니 저녁엔 좀 빨리 먹고 애 봐라." 일까. 전자일 거라 믿고 화제를 돌렸지만 역시나 후자가 답이었던 것 같다. 서운한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느리게 먹는 내가 답답하고 꼴 보기 싫었을 수 있다. 하루 종일 애한테 시달리면서 밥도 대충 먹었는데 한가로운 나를 보면 한대 치고 싶었겠지.(하지만 난 나름 치열했다. 전혀 여유롭지 않았다.) 그래도 굳이 저렇게 표현했어야 했나 싶다. 남도 아니고 가족인데, 돌려 말할 수도 있고 농담을 섞어서 얘기할 수도 있었던 것을. 오히려 저런 소리를 듣고 웃으며 서둘러 화제를 돌리는 내가 보인다. 헛수고였다. 아내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동안 혹은 오늘 특히나 더 쌓인 스트레스와 울분이 터진 듯하다. 아무렇지 않게 웃어넘기려는 내 반응 탓인지, 아내 스스로 한 저 말이 트리거가 되어버린 탓인지, 아니면 둘 다일지 모르겠다.(물론 아내가 감기 기운으로 평소보다 컨디션이 더 안 좋았을 날이다.)


세상 남편들은 다들 그래야 하는 거였나. 종일 육아 때문에 받은 스트레스를 듣는 게 아니고 직접 맞아서 풀어줘야 하는 거였나. 어떤 말이 아내의 트리거가 될지 예상할 수 없다. 괜히 말해서 싸움이 날 바에는 그냥 조용히 있는 게 평화롭다.(그나마 아이가 조금씩 커가고 육아도 익숙해져 가면서 트리거가 당겨지는 빈도수가 줄어들고 있다.)


다만. 남자니까, 남편이니까 이해하라는 말.. 그다지 합리화되지 않는 날이 있다. 나도 어느 날엔 위로받고 싶고, 존중받고 싶다. 오늘이 그런 날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너 살 빠졌더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