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불 씨는 입사하게 되면 우리 회사를 위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요?"
1차 면접을 거쳐 최종 임원 면접. 대표와 1:1로 마주 앉자마자 들었던 질문에 잠시 혼란스러웠다. 예상 질문에 없다. 미리 준비했던 다른 답변을 요리조리 변형시켜 봐도 시원한 답이 될 것 같지 않다. 이 질문에는 어떤 의도가 숨어있는가.
"제가 오히려 여쭤봐야 할 것 같은데요? 저에게 어떤 일을 맡겨주실까요? 일하면서 직접 확인해보고 싶습니다. 제가 회사의 발전을 위해 어떤 역량을 얼마만큼 발휘할 수 있는지를 요."
20대의 나는 저렇게 맹랑했다. 당황한 듯한 표정으로 나를 잠시 바라보던 대표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때 이미 알아챘어야 했다. 역시 면접은 회사가 나를 일방적으로 평가하는 자리가 아니라 나 역시 회사를 파악하는 중요한 시간이다.
나에게는 네 번째 직장이자 가장 짧은 기간 일했던 이곳은 업계에서 막 두각을 나타내던 회사였다. 회사 사이즈가 커지면서 업무가 세분화되던 시점이라 내가 지원했던 홍보직도 신규채용을 진행했던 것이다. 첫 출근날부터 나는 부릉부릉 시동을 걸었다. 면접 때 뱉어놓은 이야기도 있거니와, 예전부터 좋은 이미지로 봐두었던 회사에서 일할 수 있게 된 게 마냥 신났던 거였다.
신입이면 대부분 그렇듯이 처음 며칠은 회사 돌아가는 전체적인 사정을 익히느라 바빴다. 내부에 들어와 바라본 회사는 밖에서 보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회사의 비전은 더 명확하게 보였고, 성장세에 있는 회사답게 다들 가열찼다. 그래, 이제 함께 달리면 되겠구나!
하지만, 아쉽게도 한 달 정도 출근하고 사직서를 냈다. 그때까지 나도 회사도 잘 몰랐던 거다. 적재적소의 중요성에 대해 말이다.
나는 시키는 일은 성실하게, 성과도 제법 잘 내는 전형적인 '아랫사람형'이다. 조금만 위로 올라가 큰 그림을 그리는 일을 맡게 되면 고소공포증에 어질어질해진다. 이 증상은 '짬'으로 어느 정도 완화된다. 업무경력을 차근차근 쌓아가며 올라가면 어지러움을 이겨내고 멀리 볼 줄 알게 되는 것이다. 회사에서 경력직을 선발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당시 회사에는 홍보를 담당하는 팀이 따로 없었다. 누군가 겸직으로 하던 일을 떼어서 본격적으로 해나가야 하는, 말 그대로 일당백해야 하는 자리에 내가 앉게 된 것이었는데 그때 나는 고작 직장생활 3년 차, 그것도 방송국이라는 특이 직종에서 벗어난 지 한 달도 안 된 햇병아리였다. 주도적으로 업무를 해나가기엔 무리일 수밖에. 회사에서도 어떤 일을 어떻게 시켜야 할지 막연하다 보니 내가 알아서 모든 걸 해내길 바라는 눈치였다.
부리는 사람이든 일하는 사람이든 누구 하나는 확실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일은 더뎌지고 서로 불만만 쌓이게 된다. 결국 한 달 정도 출근하고 사직서를 냈다. 이 자리에는 연차가 좀 있는 경력자가 와서 속도감 있게 일하는 게 맞았다. 이후로는 입사지원할 때 회사의 조직도를 먼저 살펴보는 버릇이 생겼다. 팀의 구성은 어떠한지, 어떤 업무들을 담당하게 되는 건지, 단독으로 맡게 되는 건지 등도 확인해 두는 게 필요하다.
회사도 일하는 사람도 입사 후 당황하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그렇게 되면 결국 모두에게 손해다. 알맞은 사람이 적당한 자리에서 일하는 것. 이 단순하고 어려운 일을 위해 오늘도 눈에 불을 켜는 회사와 구직자들에게 건투를 빈다.
20여 년간 12개의 직업을 거쳐왔다. 자체 숨김한 이력을 제외하고도 이력서는 늘 두 장을 채웠다. 그 사이 경험은 늘었고 조언은 꼰대마냥 길어졌다. 그러다가 이력서 불려 가는 걸 잠시 멈춘 요즘, 그간의 시간을 돌아보며 '존버'하는 이들을 존경하게 됐고, 깊은 우물을 가진 이들을 마냥 부러워하게 됐다.
그래서 이제 첫 번째 이력서는 접어두고 새 이력서 용지를 꺼내 들었다. 그간의 이력들은 '인생 경험'이라는 단어로 압축해 한 줄에 적어본다. 이 뒤로는 어떤 이력들을 적게 될까. 더 이상 지저분한 이력서가 아니라 앞으로의 행보가 궁금해지는 지켜볼만한 이력서를 써 내려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