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가 시간이 다 되어서요. 나가보셔도 좋습니다."
면접 내내 핸드폰 액정을 톡톡 두드리며 시간을 흘끔거리던 면접관이 건조하게 말했다. 벌게진 얼굴로 꾸벅 인사를 하고 방을 나왔다. 끝까지 미소 띤 얼굴을 하고 싶었지만 불쾌감 앞에서 표정관리 실패.
결국 면접을 봤다. 당일 아침까지도 갈지 말지 마음을 정하지 못했었다. 마침 올 들어 가장 추운 날이기도 했다. 비루하지만 면접을 가지 않은 변명거리로 제법 괜찮겠다 싶기까지 했다. 기껏 원서를 쓰고, 꾸역꾸역 우체국에 가서 서류 접수까지 해놓고선 이제 와 왜 이렇게 주저되는 것인가.
사실, 이번에 지원한 회사는 10년 전 근무했던 옛 직장이었다. 상사에게 호되게 가스라이팅 당하면서 내 육체와 정신을 갉아먹었던, 지금은 그 상사도 나도 그곳에 없지만 '그 멍청하게 당하다가 그만둔 애'에 대한 소문은 전설처럼 여전히 돌고 있는 곳. 상황이 어찌 됐든 이제는 뒷걸음질 치거나 눈 감지 않고 직시하고 싶었다. 10년간 내 속 어딘가에서 불어나 있을 배짱과 용기를 믿고 다시 덤비고 싶었다. 상처받은 곳에서 치유하고 싶었다.
하지만 막상 마주하려니 트라우마가 발목을 잡았다. 아침에 눈뜨면 눈물부터 나왔던, 당장이라도 회사 창문을 열고 뛰어내리고 싶었던 그 순간들이 10년이라는 시간을 제치고 눈앞에 그려졌다. 그래도, 시작을 했으니 마무리를 해야지. 그렇게 돌아설까 말까를 고민하며 옛 직장 앞에 도착했다. 면접 30분 전이었다.
면접은 총 열두 명. 한 명이 오지 않아 총 열한 명. 인원이 많아 조별 면접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개별 면접이었다. 열 명이 넘는 인원을 같은 시간에 부르다니. 거의 마지막 순서에 가까웠던 나는 오래 기다릴 걸 각오해야만 했다.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왔지만 면접은 면접이니 긴장될 수밖에. 다들 준비해 온 예상 질문 답변지를 읽는 동안 나는 열 명의 표정을 읽었다. 면접장에서의 버릇이다. 어차피 대기실에서 텍스트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걸 잘 안다. 요구하는 경력이 꽤 있었던지라 다들 나이가 제법 있어 보였다. 40대 중후반쯤 되어 보이는 이도 서넛 됐다. 젊은이들은 젊은이답게, 나이 든 이들은 나이 든 이들답게 이미 얼굴에서 총명함과 노련함이 읽혔다. 그런 인상들을 마주할 때마다 늘 위축감을 느낀다. 얼마나 똑부러지게 멋진 답변들을 꺼내놓을까.
열두 개의 직업, 그보다 더 많은 수의 직장을 거쳐오면서 면접을 수도 없이 봤다. 누적 승률은 95% 정도. 물론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어오기도 했지만 내 기준에선 나쁘지 않은 결과였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긴장감, 세상 제일 똑똑해 보이는 경쟁자들, 질문이 더해갈수록 육체와 분리돼 아득해지는 멘털. 이 모든 걸 '즐겨보자'라는 허세 섞인 기분으로 겪어왔었다.
그리고 또 하나. 면접관 중에 내가 맡게 될 업무를 구체적으로 아는 사람은 한 명 정도라는 것, 대부분의 면접관들도 실무에 대한 답을 모르기 때문에 결국 기세 싸움이라는 걸 깨닫게 됐다. 그 이후로는 일부러 자신감 넘치는 태도로 면접을 봐왔는데 다행히 그동안 잘 먹혀왔다. 이번에는 어떨까.
드디어 면접 시작. 첫 번째 면접자는 18분, 두 번째 면접자는 16분... 면접자들이 들어오고 나오는 시간을 체크하며 시계를 흘끔거렸다. 이 정도 속도라면 족히 세 시간은 기다려야겠다 싶었다. 그런데 웬 걸, 네 번째 면접자가 나온 후부터 속도가 갑자기 빨라졌다. 13분, 10분... 그리고 나는 8분 컷.
당연한 얘기지만 면접은 모든 조건이 동일한 가운데 진행되어야 한다. 아무리 수준 이하의 면접자라 평가했을지라도 면접시간은 동일하게 주어져야 하는 것이 기본인 것이다. 면접관 이외에 배석하는 면접 진행자들이 해야 하는 일이 바로 그 타임체크다. 나 역시도 전 직장에서 몇 번의 면접 진행을 담당하면서 타이머를 사용하기까지 했었다. 그런데 이건 무슨 경우인가.
회사 밖으로 나왔다. 열기로 붉어진 볼이 찬기에 다시 붉어졌다. 어지러운 마음에 정처 없이 걷는데 지인에게 전화가 왔다. 면접 이야기를 꺼냈더니 마침 내부상황을 잘 알고 있던 그가 조심스럽게 내정자가 있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현재 그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이가 계약기간이 만료되어 채용공고가 새롭게 났고, 일을 잘하고 있기 때문에 재응시하면 '큰 이변이 없는 한' 다시 일할 기회를 주자고 내부에서 이야기가 되었다는 것. 늘 겪어온 일이지만 내정자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다. 적어도 '큰 이변'을 만들어내야 한다.
며칠 전 합격자 발표가 났다. 네 번째 면접자였다. 면접관들이 티를 너무 냈다 싶어 피식 웃음이 났다. 촌스럽긴.
자신하건대 앞으로 이런 일들을 겪지 않을 것이다. 나는 회사에 속하지 않기로 단단히 마음먹었으니까. 아마도 이번 면접은 내 진로 결정에 있어 큰 가지치기를 할 수 있었던 기회로 남을 거다. 자꾸만 곁눈질하던 월급쟁이의 길을 과감하게 잘라낼 수 있었으니까. 덕분에 시야가 조금 트인 것 같다.
면접은 까뒤집어보면 눈앞의 면접관 말고도 넘어야 할 존재들이 도사리고 있는 경우들이 있다. 하지만 그런 것까지 신경 쓰기엔 역부족. 다만 어느 면접에서든 쫄지 말자. 면접장에 들어설 때 이렇게 되뇌며 어깨뽕을 넣어보자. 나는 충분히 '큰 이변'을 만들어낼 수 있는 존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