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채용공고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가뭄에 콩 나듯 올라오는 구인공고 중에서 그나마 명함을 내밀어볼 수 있을 만한 곳이었다. 얼른 서류 양식을 다운받아 파일을 여는데 영 내키지가 않았다 예전엔 이력서 양식에 이름 석 자만 적어 넣어도 입에 침이 고이면서 슬슬 흥이 돋았었는데. 누가 직업 열두 번 바꾼 사람 아니랄까 봐.
PC 앞에 앉아 머뭇거리고 있는데 아까부터 애써 못 들은 척하던 마음의 소리가 볼륨을 높여 왕왕거렸다.
"너 다시 회사생활 할 수 있겠어? 하고 싶은 거 맞아?"
다시 하고 싶지 않다. 6개월 전 퇴사할 때도,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그동안 대안을 찾고자 했다. 쉬울 줄 알았다. 이십여 년 사회생활 하는 동안 다양한 경험을 해보지 않았는가. 늘 하고 싶은 일이 있었고 비교적 쉽게 저질러오지 않았는가.
하지만 40대의 나는 달라져 있었다. 흥미도, 패기도 사그라들었고 불씨는 좀처럼 살아나지 않았다. 천천히 가자고 스스로 다독였지만 결국 마음만 조급해졌고, 습관처럼 구인 사이트를 열어보고 있던 참이었다. 내 마음은 내 인생에 대해 좀처럼 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원서 마감 전날까지도 서류를 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했다. 결국 종일 아무것도 못하고 애먼 PC만 켰다 껐다 하다가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눈을 뜨면 마감시간이 지나있길 바라면서. 결정이 어려우면 내려놓고 도망쳐버리는, 비겁한 회피는 나아질 기미가 없는 내 오래된 병이다.
그랬는데, 정말 거짓말처럼 자정에 눈이 번쩍 떠졌다. 요즘은 자다 깨는 게 흔한 일이다 보니 대수롭지 않게 다시 눈을 감았지만, 이상하게 갈수록 정신이 맑아졌다. 몇 번을 뒤척이다 홀린 듯 PC 앞에 앉았다. 자기소개서, 직무계획서, 포트폴리오... 결국 날이 밝을 때까지 서류를 작성하고 제출까지 일사천리로 끝냈다. 평소 같았으면 남편에게 피드백을 한 번 받았을 법도 했는데 그런 것도 없었다. 무슨 정신이었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그렇게 뭔지 모를 것에 등 떠밀리듯 서류를 냈던 게 2025년의 마지막 날이었는데, 어제서야 결과가 발표됐다. 일주일 후 나는 무려 열한 명의 경쟁자와 면접관 앞에 앉게 될 예정이다. 감사하나 마냥 기쁘지 않다. 배부른 소리라 생각하겠지만, 눈앞의 현실에 급급해 답 없는 쳇바퀴 속으로 다시 굴러들어가고 싶지 않은 것뿐이다. 맘먹고 튕겨져 나왔으니 기왕이면 덜 괴롭고 오래 굴릴 수 있는 바퀴 위에 올라타고 싶단 생각인 거다.
좋아하는 일을 밥벌이로 삼을 수 있는 건 소수에게 주어지는 축복임에 분명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회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먹고사는 일에 숨통이 조금 트일 때까지는 일의 호불호를 따지기 전에 그저 묵묵하게 걷는다. 그렇게 버티고 견디면서 발바닥에 굳은살을 만들어 가다 보면 돌길도 가시밭길도 대수롭지 않게 걸을 수 있게 되고, 결국엔 나만의 꽃길에 다다르게 되는 게 순리겠지. 그런 면에서 나는 대책 없이 살아온 게 맞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뒤늦게 방황하고 있는 걸지도.
요즘 내 상황이 이렇다 보니 SNS를 비롯해 주변에 용기 있는 분들의 이야기에 시선이 오래 멈춘다. 중년의 나이에 비로소 하고 싶은 일을 시작하는 사람들. 먼 길을 돌아 드디어 마지막 닻을 내리는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에너지는 청춘의 것보다 심지가 길고 속까지 뜨겁다. 쉽게 꺼지지 않을 그 열정이 부럽다.
시작은커녕 이제서야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나선 중년의 나는 괜찮은 걸까. 그저 늦지 않았길, 더 많이 지체되지 않길 바랄 뿐이다.
랜덤으로 틀어둔 유튜브 영상 속에서 로이킴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처음 들어보는 노래인데 마치 때맞춰 나에게 주는 메시지 같다.
솔직해지고 싶은데
불안해야만 한다면
내가 걸어가고 있는
이 길이 정말 옳은 길인 걸까
사랑을 주지 못하는 마음들과
끝이 없는 기대들이
나를 짓누르는 이 세상에서
누군가 갑작스레
당신의 안부를 물어왔을 때
망설임 없이 너는 행복하다
말할 수 있게 내가 노래해 줄게
괜찮을거야 괜찮을거야
괜찮을거야 괜찮을거야
- 로이킴 <괜찮을거야> 中
나는 결국 면접을 보게 될까. 모르겠다. 그때까지 내 마음이 숨거나 도망치지 않고 명확한 답을 내릴 수 있을까. 그것도 확실치 않다. 다음 주까지 살아보고 보고 드리겠다. 무엇이든 좋은 선택이길 빌어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