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오피니언 [패션캔버스]
한국은 2017년 고령사회를 맞이했다. 통계청에 따르면 2025년에는 우리나라 인구 5명 중 1명이 시니어일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시니어들의 의복과 의생활에 대한 관심은 아직 부족하기만 하다.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의복의 범위는 젊은 세대들의 그것에 비해 턱없이 적다. 천편일률적인 디자인에 너무 단조롭거나 혹은 과도하게 화려한 일상복뿐이다. 그들이 알록달록한 등산복을 즐겨 입는 이유는 그만큼 시니어들의 신체적 특징과 제한을 고려한 의복을 찾기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다.
본래 패션은 청년 세대들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문화의 등장과 변화를 주축으로 한다. 그러나 나이나 어떤 신체적 제한과 관계없이 누구나 자신을 표현하고, 삶을 다채롭게 즐기기 위한 생활양식으로서 의생활을 누릴 권리가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래도 긍정적인 점은 패션에서 시니어들의 영향력, 즉 ‘그레이 파워’가 점차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2015년 생로랑은 70대에 접어든 가수 조니 미첼을 모델로 내세웠고, 같은 해 셀린도 80대의 미국 작가 존 디디온을 캠페인 모델로 선보였다. 이 밖에도 사회아동복지학 교수이자 시니어 모델로 활동하는 70대의 린 슬레이터, 100세가 넘은 패션 아이콘 아이리스 아펠도 있다. 국내에는 유튜브 채널 ‘밀라논나’를 운영하는 패션 디자이너 출신 정명숙 씨나 윤여정 배우(사진)가 시니어 패션을 넘어서 젊은이들의 패션에도 영향을 미치는 패션 아이콘이다.
이들이 선보이는 그레이 패션의 핵심은 무엇보다도 패션에 대한 그들의 자신감 있는 태도에서 드러난다. 그들은 젊은 세대들이 즐겨 입는 브랜드와 스타일을 시도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무작정 유행 스타일을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자신의 취향과 안목을 더해 자신만의 스타일로 만든다. 윤여정 배우는 꼼데가르송과 알파인더스트리가 협업해 만든 항공 점퍼, 스트라이프 티셔츠에 청바지, 반바지에 양말과 스니커즈를 착용하는 등 젊은 세대들이 선호하는 스타일을 자연스럽게 소화해 낸다. 이 밖에도 그레이 패셔니스타들은 무작정 펑퍼짐한 옷으로 체형을 가리는 대신, 자신 있는 부분은 드러내며 본인의 개성을 강조한다. 또 화이트, 블랙, 베이지, 그레이 등 주로 차분한 색상의 옷을 착용하고, 오렌지, 블루, 핑크색 같은 포인트 컬러나 패턴이 들어간 가방이나 신발, 액세서리를 매치한다. 게다가 좋은 소재와 봉제의 질을 구별할 수 있는 그들의 안목은 그레이 패션에 고급스러움을 더한다.
우리보다 20여 년 먼저 고령사회에 들어선 일본은 관련 정책이나 산업, 문화, 생활 서비스 등이 활성화되어 있다. 고베예술공과대학 미테라 사다코 교수는 시니어들의 신체와 생활양식의 변화에 따라 고려해야 할 디자인 요소들을 바탕으로 그레이 패션을 제안했다. 앞으로 우리도 누구나 패션을 즐길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고민해야 한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그들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우리의 마음이다.
원문: https://www.donga.com/news/Opinion/article/all/20231114/12218151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