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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기 초보 Jul 15. 2022

<안젤리카의 이상한 사건> 리뷰

죽어있는 것에 매혹을 느끼는 카메라. 그래서 더욱 살아있는 예술

예술은 살아있는 것보다 죽어있는 과거에 더 매혹을 느낀다. 그리고 예술은 과거의 시간을 담기 위해 노력한다. 카메라는 죽은 것을 담아낸다. 카메라를 지나는 순간 시간은 머무르고 그 죽은 것이 안된다. 그 시간은 프레임 안에서만 살아있고 프레임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삭은 예술가다. 카메라를 들고 죽은 것을 찍기 시작한다. 프레임 안에 어떠한 형태를 담고 그 것을 머무르게 한다. 죽은 것은 움직이지 않는다. 그대로 머무르고 그 속에 가두어진 상태다. 이삭은 계속 해서 죽은 것을 찍고 죽은 것에 매혹되어 있다. 안젤리카의 죽은 모습을 찍는다. 이제는 과거가 되어버린 쟁기질을 찍는다. 이 영화의 포스터에도 그려졌지만 그는 문틈 프레임에 자주 등장한다. 프레임 안에 스스로를 가두었다. 그는 식사를 하는 순간에도 손에 커피잔을 든 상태로 창문만 바라 본다. 그의 눈은 프레임에 멈추어져 있고 갇혀버린 것을 바라본다. 영화는 프레임을 자주 나눈다. 처음에 이삭이 안젤리카의 사진을 찍기 위해 집에 갔을 때 응접실에 가족들이 앉아있고 그 뒤로 문이 보인다. 문 안으로 들어가면 안젤리카의 시신이 있을 것을 관객은 알고 있다. 프레임, 즉 문 밖에는 살아있는 가족들이 있지만, 프레임 안, 즉 문 안에는 죽음으로 하나의 시간 안에 머무르고 있는 안젤리카가 있다. 사진의 프레임, 영화의 프레임은 멈추어버린, 죽음의 상태를 담는다. 영화감독, 사진작가는 죽음이라는 멈추어진 상태에 매혹된 사람들이다. 영화는  유독 영화에서 많은 것들은 갇힌 상태다. 안젤리카의 집에 어항 속의 물고기, 주스띠나 부인이 기르던 새는 갇혀있다. 프레임 안에 갇힌 그들이다. 안젤리카의 어머니가 이삭을 부르고 이삭에게 앨범에 담을 사진을 요구했을 때, 이삭은 뛰쳐나가 창살을 잡고 소리친다. 프레임에 갇힌 이상은 삶의 영역에서 혼돈을 느낀다. 죽음에 매혹되고 머릿속에서는 죽음에 살고 있다. 안젤리카의 세상에 존재하지만 그가 서있는 세상이나 그가 하는 이야기는 프레임 안이 아니다. 어떤 공간. 예술의 공간으로 뛰어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마지막 아이작의 모습은 아이작은 테라스를 향해 간다. 테라스의 테두리 안에 아이작이 들어오는 순간 아이작은 쓰려진다. 안젤리카의 손을 잡고 사라진다. 프레임 안으로 들어간 아이작은 영화의 세계, 사진의 세계로 사라진다. 영화의 세계, 사진의 세계에 사로잡힌 감독, 사진가, 아이작은 죽음에 매혹된 사람들이다. 예술은 영원할 수 없는 인간이 영원을 추구하는 과정이다. 영생이라는 삶의 과정이다. 사람은 죽지만 예술은 영원이 살아남아 영생한다. 하지만 그 영생은 필연적으로 죽은 상태다. 사진의 피사체는 멈추어 있다. 영화의 피사체도 필름 안에 멈추어진 상태다. 삶 욕망과 죽음의 욕망은 교차한다. 과거의 시간에 있는 쟁기질은 힘차다. 하지만 현재의 시간이 있는 트랙터는 죽어버린 상태다. 과거의 시간은 힘차고 살아있지만 현재의 시간은 죽어버린 상태이다. 힘찬 쟁기질 하는 사진은 얼굴이 보이지 않고 표정이 없다. 하지만 죽은 안젤리카의 사진은 표정이 있고 화사하다. 안젤리카의 사진과 쟁기질하는 농부의 사진을 보면 삶과 죽음은 교차되어 있다.  프레임 안에서 죽어버린 멈춰 버린 것이 예술이다. 하지만 예술을 마냥 죽었다고 할 수 없다. 죽었지만 살아있는 것, 그게 예술이고 우리는 거기에 매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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