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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기 초보 Jul 15. 2022

<베로니카 포스의 갈망> 리뷰

전후 독일, 그리고 독일 영화는 여전히 병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독일에서 파시즘은 사라졌다. 하지만 돈이라는 힘을 가진 자본주의가 파시즘의 자리를 대신 지배한다. 베로니카 포스와 괴벨스의 관계는 정확히 나오지 않는다. 대략 추측 가능한 것은 베로니카 포스가 파시즘에 매달려서 나치즘의 시대를 극복했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파시즘이 사라진 자리 베로니카 포스는 돈을 통해서 모르핀이 중독된다. 돈이 없다면 모르핀도 없다. 돈과 모르핀이 없다면 죽는다. 결국 자본주의에 생을 결탁한 것이다. 결국 전체주의는 지속된다. 나치즘에서 자본주의로 변했을 뿐이다. 아마도 추측할 수 있는 것은 UFA 영화 시절 베로니카 포스가 나름 괜찮은 배우였다는 것이다. UFA 영화 시절, 표현주의 영화는 나치에 비협조적이었다. 대다수 영화인은 미국, 영국으로 망명을 떠났다. 그런 UFA 시대의 영화배우인 베로니카 포스가 나치시대에 살아남았다는 것은 나치즘에 협력했다는 것 아닐까? 그리고 나치즘이 사라지고 자본주의에 협력 혹은 노예가 되어 버린 게 베로니카 포스다.  베로니카 포스의 꿈 속에서 나오는 영화사는 유나이티트, MGM, 20세기 폭스 사다. UFA 독일 표현주의가 사라지고 독일 영화는 사라졌다. 영화는 곧 미국 영화만이 남아 버린 시대. 독일 영화는 나치의 지배를 벗어났지만, 미국 자본주의 돈의 지배를 다시 받는다. UFA 시대 표현주의 영광은 사라져버렸다.  물론 파스빈더는 그 영광을 꿈꾸는 것 같다. 과장된 조명은 이 영화에서 왜곡된 베로니카나 카츠 박사, 로베르트의 영혼이나 꿈 같은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한편에서 독일 표현주의 시대의 모습이기도 하다. 파스빈더는 표현주의 시대의 영광과 상실, 왜곡을 한 장면에서 보여준다. 카츠박사의 병원은 밝고 경쾌하다. 화사하며, 밝은 음악이 흘러나온다. 영화 속에서 타인의 영혼을 조작하며 돈으로 모든 것을 사는 악의 공간이다. 어찌보면 자본주의의 공간 그 자체다. 하지만 화려하며 살기 좋아 보인다. 자본주의가 그런 것 아닐까? 헐리우드가 그런 것 아닐까? 화려하고 살기 좋아보이지만 그 속에서는 돈으로 이루어진 지옥이 있다. 트래블링카에서 살아남은 유대인 부부. 그들에게서 나치즘은 사라졌다. 하지만 고통은 없어지지 않는다. 카츠 박사로 대표되는 착취의 대상은 여전히 존재하고 그들의 삶은 저당잡혀있다. 하지만 그들은 행복하다고 말한다. 혹은 만족한다. 원래 그런 게 민중의, 힘없는 사람의 삶일지도 모르니. 로베르트의 동인은 알 수 없다 .베로니카 포스에 대한 사랑인지, 혹은 기자로서의 정의인지. 그저 그는 뭔가 진실을 알고 싶었다. 하지만 그에게 진실은 친절하지 않았다. 여자친구는 살해당하고, 경찰과 카츠 박사는 사실을 왜곡한다. 유태인 노부부는 그에게 젊은이라고 했다. 그는 진짜 '젊은이'일 것이다. 새로운 독일을 꿈꾸는 젊은이. 하지만 젊은 이에게는 힘이 없다. 그 시도 조차 무력하게 무너진다. 68년도의 기억은 파스빈더에게 그런 기억일 것이다. 젊은이들이 나치즘과 자본주의의 시대를 끝내고 진실을 찾고자 했지만. 자본주의는 나치즘이었고, 나치즘은 자본주의였다. 그리고 그들이 이겼다. 그렇게 로베르트, 더 나아가 독일 젊은이에게 남은 것은 그저 처절한 패배감 뿐이다. 신문의 이면에 부정의가 있음을 알아도 외면할 수 밖에 없는 그런 패배감. 자본가들의 탐욕을 바라만 보고 떠날 수 없는 마무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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