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쓰기 초보 Jul 15. 2022

<기관총부대> 리뷰

기호의 통치, 기호의 거짓. 기호의 본질.

프롤레타리아트를 통치하는 자본주의 거짓된 기호다. 전쟁은 기호에서 시작된다. 왕의 언어. 모든 것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하는 기호다. 하지만 기호는 사실이 아니다. 단지, 부르주아의 언어만 있을 뿐이다. 오염된 기호에서 착취 당하는 사람은 착취당할 뿐이다. 왕은 모든 것을 줄 수 있다고 말한다. 노동자는 열심히 일하면 부자가 되고, 군인은 열심히 전투하면 명예를 얻을 것이다. 하지만 그 모두 거짓이고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믿는다. 그런 언어에 익숙해졌으니. 전쟁은 실재하는가. 소리와 영상으로만 있는가. 전쟁에 뛰어든 미켈란젤로와 율리시즈에게 전쟁은 실재하지 않는다. 관객에 전쟁이 실재하는 방식은 자료화면과 사운드이다. 전쟁은 벌어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위협은 존재하는가. 그 것이 그들에게 실질적인 위협이 되는가. 다 허상이지 않을까? 기호가 실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기호는 기호일 뿐이다. 연결되는 사람 간의 의미가 실재를 만든다. 미켈란젤로가 바라본 렘브란트는 실재하는 재화가 아니다. 미켈란젤로에게는 그저 벽에 걸린 그림이다. 렘브란트가 가치를 가진 재화가 되는 순간은 그에게도 기호가 의미로 다가오는 순간이다. 기호가 통치를 하고 실재를 갖는 순간은 기호의 상호성이다. 영화를 처음 본 미켈란젤로의 반응은 현실과 뒤엉켜있다. 영화라는 표상, 기호는 현실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것을 보면서 현실과 혼란을 겪는다. 영화의 의미도 약속에서 시작한다. 약속하지 않으면 그저 현실과 허상의 혼돈일 뿐이다. 전쟁이라는 기호는 결국 지배층이 만들어낸 혼돈에서 성립한다. 전쟁은 실재한다 믿는다. 전쟁이 성립된다. 어느 누구도 현실과 거짓의 경계를 말하지 않은 영화, 의미를 약속하지 않은 렘브란트는 어떠한 정의도 성립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기호의 의미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정말 약속인가. 아닐 수도 있다. 그저 지배층이 만든 그런 것들 뿐이다. 왕이, 지배층이 만든 전쟁이라는 기호, 자본주의의 소비라는 기호는 그렇게 우리는 현실과 혼돈시키는. 혹은 현실을 넘어서는 어떠한 마취제로서 작동한다. 미켈란젤로와 율리시즈가 가져온 것은 이미지들 뿐이다. 그들은 어떠한 욕망을 추구했지만 그들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욕망의 이미지들 뿐이다. 소비라는 자본주의의 욕망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부와 영광을 줄 수 있는 것 같이 말한다. 노력이나 지배층의 논리만 따르면. 하지만 성취할 수 없다. 그들이 얻을 수 있는 것은 결국 욕망의 이미지들 뿐이다. 손에 잡히지 않는 세상의, 물질의 이미지들. 그들에게 떨어지는 포상은 훈장 쪼가리와 같은 허상된 이미지다. 잡히지 않는 포상만이 그들의 손에 머무른다. 혁명은 일어난다. 그들에게 혁명은 무엇을 줄 것이다. 혁명에 뛰어들어라 그러면 변할 것인가를 말하는가. 혁명에서 벗어나 부르주아의 논리에 끝까지 머무르는 그들에게는 결국 총탄 소리만 남을 것인가.

매거진의 이전글 <베로니카 포스의 갈망> 리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